‘한국교회가 총체적인 위기에 빠졌다’는 말이 회자된 지 오래다. 그 내용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이 말이 더 이상 어떤 감흥이나 위기감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현실 자체가 한국교회의 병증이 갖고 있는 무게를 짐작케 한다. 130년 역사를 가진 한국교회에 대해 교회사가들은 ‘개신교 역사상 가장 타락한 교회’ 혹은 ‘중세 가톨릭교회보다 더 부패한 교회’라고 평가한다. 안타깝지만 가장 적확한 평가임을 부인할 수 없다. 미주한인교회의 형편 역시 대동소이하다. 1903년, 하와이 이민교회를 모태로 시작된 미주한인교회는 112년에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지만, 한국교회를 능가하는 부패와 타락상으로 유명하다. 이민교회의 척박함과 타락상은 이미 극에 달한 지 오래며, 목회자들 사이에서 미주한인교회는 ‘목회자들의 무덤’으로 불린다. 그래서 많은 이민교회 목회자들이 한국교회 청빙에 목을 메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척박하고 암울한 현실에 대한 수많은 진단과 대책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여전히 변화와 소망의 싹은 요원해 보인다. 시대를 탓하고, 환경을 탓하고, 제도와 문화와 신학을 비판하는 소리가 드높지만, 소귀에 경읽기로 들리고 뚜렷한 열매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많은 목회 프로그램들이 쏟아져 나옴에도 불구하고 왜 교회는 점점 타락해가고 생명력을 잃어가는 것일까?

사람, 생명, 삶에 주목하자

필자 역시 많은 진단과 대책과 프로그램의 유용성에 대체로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이 모든 것들이 실패로 귀결된 이유는 핵심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진단과 대책과 프로그램들은 사람, 즉 영혼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 사람과 영혼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 같지만, 정작 그 대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온갖 외면적 잣대를 가지고 교회와 사람을 평가하고 이 잣대에 적합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사람, 생명, 삶에 대한 가치가 결여된 대안은 사람을 살리고 삶을 바꾸는 생명력이 없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이 진정한 생명을 소유하고 누리도록 이끄는 종교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핵심은 제도와 문화와 조직과 환경과 건물과 교리와 신학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 사람, 사람이다. 그리고 예수를 닮은 사람의 믿음과 삶이다. 그것이 전부다. 그런데 한국교회와 미주한인교회의 현실은 어떤가? 모두가 사람과 생명과 삶을 외면하고, 물질과 제도와 조직과 지식과 신학과 문화와 건물과 돈과 현세의 축복과 종교에 주목하고 있다. 외형에 주목하고 내면의 가치를 상실한 전형적인 바리새주의가 이 시대를 점령하고 있다. 진정한 복음, 생명, 성령의 역사가 살아 숨쉴 수 있는 공간을 찾아보기 힘들다.

교회와 목회 현장에서 더 이상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 목회자가 지위, 신분, 돈, 명예, 외모와 무관하게 한 영혼의 가치를 존중하고 인격적으로 섬기는 모습이 드물다. 또한 존중하고 따라야 할 목회자를 온갖 세상적 가치 기준으로 판단하고 짓밟는 성도들로 넘쳐난다. 목회자는 힘있는 성도들의 횡포 때문에 목회가 힘들다고 호소하고, 성도들은 목회자의 부패와 전횡 때문에 신앙생활이 힘겹다고 하소연한다. 둘다 맞는 말이다. 성도들에게 상처입고 낙심한 목회자들이 넘쳐나고, 목회자에게 상처입고 교회 밖으로 밀려난 성도들이 홍수를 이룬다. 낙심한 목회자는 성도들을 원수처럼 대하고, 교회 밖으로 밀려난 성도들은 교회와 목회자를 향해 슬피 울며 이를 간다. 그러나 비록 원수라고 할지라도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라는 점을 부인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동일하다.

목회자의 변화가 열쇠

 
타락한 시대와 신앙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생존이 불가능해진 레위인(목회자)들이 생계를 위해 돈에 팔려간 사사시대의 비극(사사기 17장 이하)은 바로 이 시대 교회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부유한 성도 미가는 돈으로 신상을 만들고, 신당(교회)을 짓고, 레위인(목회자)을 사들였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돈과 물질로 만든 인위적 종교로 대체한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한 책임은 모두에게 있지만, 하나님은 더 큰 책임을 목회자에게 물으신다.

암울한 사사시대는 선지자 사무엘과 다윗의 등장으로 새로운 시대로 전진했다. 수백 년 동안 노예생활로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하고 신앙의 부흥을 이끈 것은 모세의 등장이었다. 견고한 바리새주의에 갇혀 죽어가던 유대교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기독교를 탄생시킨 것은 참 하나님이자 참 사람인 예수였다. 유대교와 유대인의 문화와 관습에 얽매인 기독교가 인종과 문화의 장벽을 넘어 이방인에게 전파된 것은 사도 바울의 공로이다. 12척의 배로 수백 척의 왜선을 격파하고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이는 한 사람 이순신이었다.

지도자 한 사람의 진정한 희생을 발판으로 하나님은 암울한 시대와 역사를 바꾸어 가신다. 우리가 이 시대와 교회의 암울함을 한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이 시대의 변화를 위해 삶을 던질 한 명의 지도자를 찾고 계신다. 지도자 한 사람이 어떻게 그 단체, 그 사회, 그 국가, 그 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지 우리는 무수한 사례를 알고 있다. 타락하고 생명력을 잃은 이 시대 교회의 변화를 기대한다면, 그 변화의 시작은 마땅히 목회자여야 한다. 그것도 유명하고 유력한 목회자가 아닌, 상처입고 낙심한 목회자여야 한다. 이 시대의 교회와 신앙과 가치의 몰락을 처절하게 경험한 목회자만이 교회와 신앙을 고사시키는 이 시대의 가치와 기준을 버리고 참 신앙, 참 복음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시대를 변화시키는 목회자

우리가 믿는 예수는 바로 십자가의 진리를 전 생애에 걸쳐 온 몸으로 증명하신 분이다. 십자가는 예수가 사신 삶을 상징할 뿐 아니라 모든 예수쟁이들이 따라야할 신앙과 삶의 지향점이다. 삶으로 증명된 예수의 십자가와 그 교훈을 통해 죄와 사망으로 신음하던 인류와 역사에 진정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것처럼, 어두운 시대를 비추는 빛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모든 것을 던지고 살아가는 진정한 예수쟁이로부터 시작된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예수쟁이가 되도록 부름받았다. 하지만 모두가 이 부르심을 외면하고 있는 시대에 마지막까지 이 부르심에 응답해야 할 책임이 목회자에게 있다. 따라서 이 시대의 목회자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보다 소명의 회복이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이유에 대한 생애를 건 고백과 결단과 헌신이 회복되어야 한다. 목회자가 자신의 소명을 회복하지 않는 한, 목회의 변화, 성도들의 변화, 교회의 변화, 시대의 변화는 요원한 일이다.

이 시대가 요청하는 목회자는 설교 잘하는 목회자가 아니라, 십자가의 진리를 실천하는 목회자이다. 낮고 가난하고 비천하고 상처입은 영혼들을 기꺼이 사랑하고 섬기는 목회자, 설교대로 살아가는 목회자, 삶으로 본을 보이는 목회자를 사람들은 갈망하고 있다. 높아지고, 유명해지고, 부유해지고, 권세와 지위를 누릴 수 있는 존경받는 자리를 찾아다니는 목회자들이 넘치는 시대에 희생과 헌신과 겸손과 낮아짐을 삶과 사역의 목표로 삼고 하루 하루 정진하는 단 한 명의 목회자를 하나님은 찾고 계신다. 목회자들이 한 사람, 한 사람 깨어나 이 시대를 비추는 이름없는 빛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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