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 한국의 선교

1. 천주교

한국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777년, 경기도에 살았던 권철신의 제자 권일신과 정약용, 정약전 등이 북경에서 가져온 천주교 서적을 읽으면서부터였다. 1794년에는 청나라 주문모 신부가 사제로서 조선에 처음 들어와 사목에 힘쓰다가, 1800년에 한강 새남터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1845년, 김대건 신부는 중국에서 한국인 최초로 사제서품을 받고, 조선에 돌아와 한양과 경기도 일대에서 사목했다. 1846년에 김대건 신부는 주교의 입국을 돕기 위해 비밀 항로를 그린 지도를 중국에 넘겨 주려다가 연평도 부근에서 관헌들에게 체포되었다. 그의 박학다식을 아까워한 대신들이 구명운동을 벌이기도 했으나, 25세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2. 희랍정교회

1900년, 러시아인 선교사가 입국해 전도하던 중 러일전쟁으로 철수했다가 강화조약 체결 이후 다시 한국에 들어왔다. 러시아 혁명으로 선교가 중단되었으나, 한국에 있던 교인들이 신앙을 유지해 왔다. 현재 한국대교구청 산하에 7개 성당이 있으며, 한인 신부들이 사역을 담당하고 있다.

3. 개신교

1832년, 네덜란드의 귀츨라프 선교사가 최초로 40일 동안 충청도 홍천 고금도와 금강 입구에 상륙하여 전도한 일이 있다. 그 후 1865년, 스코틀랜드의 토마스(R. J. Thomas) 선교사가 한국에 왔다가 대동강에서 순교하였으며, 1872년에 파송된 스코틀랜드 장로교 소속의 존 로스(J. Ross)와 존 매킨타이어(J. Mclntyre) 선교사는 동북 지방에서 전도하며 최초로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했다. 본격적인 한국 선교 사업은 1882년, 한미조약이 체결되면서 그 문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1) 미국 북장로회는 1884년, 알렌(H. N. Allen) 부부를 선교사로 보냈으며, 미국공사 푸트는 신변의 안전을 위해 그를 미공사관 무급 의사로 임명했다. 캐나다 출신의 게일(J. S. Gale) 선교사는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한글로 번역하는 등 교육 사업을 하였고, 에이비슨(O. R. Avison) 박사는 1892년부터 서울을 중심으로 의료, 전도, 교육 사업을 하였다. 마포삼열(S. A. Maffet) 박사는 평양에서, 배위량(W. M. Baird) 박사는 대구에서 전도하며 교육 사업을 벌였다.

2) 남장로교회는 1892년에 테이트(L. B. Tate)와 레이놀즈(W. D. Reynolds), 전킨(W. M. Junckin) 등 7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 전라도와 충청남도 일대를 중심으로 전도하며 사회사업을 하였다.

3) 호주 장로교에선 1889년, 데이비스(J. H. Davis) 목사와 누이동생 매리가 경상남도에서 선교 사업을 하였다. 1894년부터 아담슨(A. Adamson) 목사는 경남 지역에서 전도와 교육 사업을 했다.

4) 캐나다 장로회의 맥켄지(W. J. McKenzie) 선교사는 1893년 10월, 서울을 거쳐 황해도 장연의 솔내에서 한복을 입고 전도하다가 1년 2개월만에 병사하였다. 그 후 솔내교회가 캐나다 선교부에 청원한 결과, 1898년에 푸트(W. P. Foote) 목사, 맥크레(D. M. McCrae) 목사, 그리어슨(R. G. Grierson) 부부를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그들은 함경도를 중심으로 선교하였다.

이상의 장로교가 합하여 1912년 9월에 총회를 조직하였다.

5) 미국 북감리회는 1885년,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부부를 파송하였다. 한 달 후에 스크랜톤(W. Scranton)과 그의 모친이 입국하였다. 그 후 존스(G. H. Jones), 케이블(E. M. Cable), 모리스(C. D. Moris), 노블(W. A. Noble), 커틀러(M. M. Cutler) 등 여러 선교사들이 경기, 충청, 강원, 황해, 평안도를 중심으로 전도와 교육과 의료 사업에 힘썼다.

6) 남감리회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1895년, 윤치호씨가 미국 유학 당시, 미국 남감리회 전도국에 청원하여 헨드릭스(E. R. Hendrix) 감독과 리드(C. F. Reid) 목사가 파송되었다. 1930년 12월에 남북 감리교회 연합으로 제1회 총회를 열고 기독교 조선감리교회를 조직하였다.

7) 성결교는 미국의 감리교 신자였던 카우만(C. E. Cowman) 목사와 그의 친구 킬보른(E. A Kilbourne) 목사가 동양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일념에서 시작되었다. 1901년, 일본 동경에서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란 간판을 걸고 구령 운동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성결교가 정식으로 창설된 것은 1907년, 일본에서 동양선교회의 성서학원을 졸업한 김상준과 정빈 두 사람이 귀국하여 서울 무교동 중앙교회터에 복음전도관을 설립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 후 1912년 9월에 성결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8) 침례교는 구한국 시대에는 대한기독교라고 하였고, 일제시대에는 동아기독교라 하다가, 대한기독교침례회가 되었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기독청년회에서 1889년 12월에 펜윅(M. C. Fenwick)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인천에서 단신으로 전도했다.

9) 구세군은 1908년 10월, 런던 본영에서 파송된 호가트(R. Hoggart) 정령이 서울에 구세군 본영을 창설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노방 전도와 자선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10) YMCA는 1903년 10월 31일에 황성기독청년회라는 이름으로 창립되었고, 지(智) 덕(德) 체(體)의 함양에 치중하여, 청년의 인격을 양성하는 기관이 되었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후 장로교회는 특히 네비우스(Nevius) 방법을 채택하여 사경회, 성서학원, 신학교를 통해 교인과 교역자에게 성경 지식을 급속도로 보급시켰다.

1907년,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대부흥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타락한 이들이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났다.

일제 말에 일본 정신 앙양의 일환으로 신사 참배를 강요하자, 이에 굴복하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탄압을 받았다. 이때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주기철 목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교직자와 성도가 순교를 당했다.
한국의 교회는 국민들과 함께 8.15를 맞고 국토가 양단되는 비애와 한국전쟁을 겪었다. 지금 총소리는 멈추었으나 남북이 오고 가지를 못한다.

오늘날 열심인 전도자들에 의하여 한국 기독교의 교세가 엄청나게 확장되었다. 하지만 사이비 종교의 속출과 교파 및 교단의 끊임없는 분열로 인하여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하나의 교회’를 향한 세계의 움직임 속에서 한국 교회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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