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후의 시간이 여름 볕에 늘어진 엿가락보다 더 나른했다.

멀어도 아직 한참 멀었다. 앉았던 의자에서 섰다 다시 앉았다를 몇 번이나 했던가! 벽에 걸린 시계를 봤다. 시계바늘은 문 닫을 때인 6시까지는 까마득한 2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말이지 기어갈 기미조차 보여 주질 않고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징그러운 뱀같이 늑장을 부리고 있는 나의 시간, 마음은 그런 시간을 멀리하고 혼자 앞질러 집에 갈 6시를 향해 뛰고 있었다.

지루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전화기 옆으로 갔다. 여기저기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쁜 친구와의 통화는 금방 끝이 나지만, 혹 말 상대를 해주는 친구하고는 필요 없는 이야기, 엄마가 들으셨으면 좁쌀 껍질에 담아도 공간이 남을 허망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긴 수다가 끝나면 인터넷에 손을 뻗어 필요하지도 않은 곳을 확확 열고 텅 빈 머리 안에 남겨지지도 않을 프로를 아무거나 클릭 클릭 열고는 시간 가기를 기다리곤 했다.

어찌어찌하여 저녁이 되고 하루가 갔다. 다시 아침이 오면 어수선한 마음에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온 몸은 천근 만근 무겁기만 했다. 잠시만 쉬자는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편안한 의자에 몸을 던졌다. 시작한 하루도 전날과 마찬가지, 어서 밤이 되어 잠이나 늘어지게 자고 싶었다. 마음을 따라 주지 못하는 게으른 시간은 여전히 뒤처져서 느리게 느리게 흘렀다. 게으름으로 지치면 밤에 잠마저 도망 가버리곤 했다.

지루한 하루의 행적으로 봐선 세월도 한없이 늘어져서 가야 맞을 텐데, 어느 틈에 훌쩍 일주일이, 또 한 주일! 그러다가 한 달이, 두 달이 후딱후딱 흘러가버리고 말았다.

작년 말에 새해라는 화폭에 어떤 그림을 그릴까 했던 기대를 다시 생각해 봤다. 세월 허송하지 않고 2015년 연말에 기쁨으로 감상할 내 생에 남을 만한 훌륭한 한 폭의 그림을 그리고 싶다며 혼자 흥분했었다.

그런데 붓을 들기는커녕 물감 한 번 푼 적이 없는데 어느새 6월이 눈치를 살피지도 않고 성큼 와 버린 것을 알아 내곤 놀라고 있는 것이다. 2015년의 거의 절반을 살아본 적이 없었던 시간처럼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화폭의 절반인 반년은 그렇게 겹쳐져 삭제되어 버렸다. 잃어버린 그 시간을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의미 없이 살아온 기간에 대한 자책이 시작되었다. 그건 분명 그럴 듯한 이유로 인해 만들어진 무기력한 의지와 피곤에 찌든 육체의 합작품, 나의 수렁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허우적거릴수록 발목 잡히고 몸부림칠수록 빠져나오기 어려운 깊은 늪, 거기에 갇혀서 반 년을 수렁에게 먹이로 던져 주어버렸음을 알게 되었다.

까딱하다간 나의 유월이라는 계절뿐 아니라 모든 시간이 수렁의 밥이 되어버릴 것이다. 지금 결단이 필요했다. 나를 덮치고 있는 상황을 강한 의지로 무시해 버리고, 피곤이 억누르는 몸일지라도 과감하게 자리를 털고 나와서 운동화 끈 질끈 고쳐 매고 내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책으로 먼저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에 굵은 줄을 그어가며 하루 일과표를 만들고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적어봤다.

자는 시간 외에는 몸을 눕히지 말자. 탁자나 의자 옆에는 TV 리모컨을 두지 말자. 전화기를 꺼놓자.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컴퓨터를 켜지 말자. 헛된 공상이나 불필요한 생각들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게 하자. 어떤 일을 시작하면 그 일만 생각하자. 꼭 해야 할 일을 미루지 말자. 글쓰기로 작정한 시간에 무조건 필기도구를 책상 위에 놓고 펜을 손에서 놓지 말자. 자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을 점검하고 계획했던 일들이 끝나기까지는 잠을 자지 말자.

적다보니 생각하지도 못했던 곳, 이곳 저 곳에 수렁으로 향하는 통로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곧 시간표대로 실행을 했다. 몸을 움직이기 위하여 커피 한 잔은 필수였다. 피로감이 몰려갔다. 한 가지 한 가지 시간표대로 움직이니 성취감이 몰려와 기뻤다. 정신이 차려졌다. 늘어진 몸이 가벼워지는 듯했다. 시간표를 만들기 전보다 가뿐해진 몸을 느꼈다. 하루, 이틀이 지나갔다. 삼일이 되면서 좀 시들해졌다. 일주일이 못 되어 성취감도 희미해지고 기쁨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발걸음이 둔해졌다. 팔이 무거워 드러누울 자리를 찾았다.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또 늪으로 향하는 통로가 여기저기서 열리고 슬슬 빠져들고 있었다. 한계가 분명했다. 난 그렇게 약한 자였다.

주님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염치없어서 망설이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다윗을 기막힌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다윗의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다윗의 걸음을 견고케 하셨던 하나님! 저도 제 힘으로는 헤어날 수 없는 기가 막힌 수렁에서 건저 주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소서.”

한계를 만나고서야만이 주님께 엎드리는 나, 바닥까지 떨어질 수밖에 없는 나약한 믿음의 소유자임을 또 인정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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