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에 물든 교회

2천 년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복음이 처음 전해진 나라나 지역에서 초창기 교회는 예외없이 핍박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정직과 포용과 신뢰의 표상으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한국교회와 해외한인교회의 짧은 역사를 살펴봐도, 기독교와 기독교인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대체로‘정직하고 성실하며 사회와 이웃에 대한 봉사와 사랑이 있는 종교와 종교인’이라는 것이었다. 적어도 기독교가 사회의 신뢰와 존경을 잃지 않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는 어느 순간 부정적인 이미지를 넘어서 추악한 거짓과 탐욕의 화신으로 바뀌었다.

어느 대형교회 목사의 학력위조와 표절에 대한 논란은 한동안 한국교회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고, 최근에는 다수의 저명한 신학자들이 표절 시비로 곤경에 처해 있다. 이런 현상은 일부 목회자나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회와 한인교회 전체에 만연한 보편적인 현상이다. 교회에 갈등과 분쟁이 발생하면 필연적으로 거짓이 난무하고 서로를 거짓말쟁이로 매도한다. 어느새 기독교는 진리와 진실의 종교가 아니라 거짓을 방관하고 조장하는 종교로 전락했다.

우리를 더욱 실망시키는 것은 거짓에 대한 교회의 대처 방식이다. 죄와 죄인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죄에 대한 준엄한 심판과 철저한 징계’, 그리고 ‘진정으로 회개한 죄인에 대한 용서와 관용’으로 요약된다. 모호한 사랑으로 죄를 덮고, 최소한의 회개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 죄인을 무작정 포용하는 것은 기독교의 진리를 값싼 은혜로 오염시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먼저 죄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뜻한다. 죄 짐을 진 하나님의 독생자조차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은 이 십자가 심판 이후에 주어진다. 죄를 회개한 자에게 용서가 부여되고, 죄인됨을 자복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로 불린다. 회개와 용서, 심판과 사랑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다. 십자가와 부활은 함께 붙들어야 할 진리이다.

그런데 교회는 더 이상 죄에 대한 철저한 심판과 회개를 선포하지 않고 실천하지도 않는다. 거짓에 대한 철저한 징계와 거짓증거한 자의 진정한 회개 촉구를 외면하고, 서둘러 진실을 은폐하고 용서하는 것은 교회 전체를 거짓으로 오염시키는 치명적인 범죄이다. 소유를 판 값의 일부를 감추고 헌금한 아나니아와 삽비라에 대한 심판(행 5장 1-11절)은 사랑과 진리로 충만한 교회에 거짓이 얼마나 치명적인 독소가 되는지를 잘 보여 준다. 어설픈 사랑, 관용, 용서, 은혜로 죄에 대한 심판과 저주와 경고와 경책을 덮어서는 안 된다.

탐욕의 화신이 된 교회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것이다. 탐심, 즉 탐욕을 경계하라는 말이다. 탐욕은 세상을 이끄는 근원적인 힘이다. 탐욕을 품는 자는 신앙이 아니라 세상의 힘에 의지해 살아간다. 반면 신약의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이다.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단순하고 분명한 명령이다. 즉 신구약 성경은 이웃을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도구로 보지 말고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나누고 섬겨야 할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라고 말하고 있다. 이 교훈을 그대로 실천한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자발적으로 재산을 팔아 가난한 형제들과 나누는 신앙공동체가 되었고, 3세기에 걸친 초대교회 역사를 통해 이 교훈은 기독교의 DNA로 자리잡았다.

나눔,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 낮아짐 등 기독교의 핵심적 가치가 약화되기 시작한 것은 핍박의 시대가 가고 풍요와 번영의 시대가 도래하면서부터이다.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기독교 신앙은 세상에서 출세와 부귀와 영화를 보장하는 방편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교회 내 권력 투쟁이 점화되었고, 교회는 부를 축적하고 화려한 예배당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중세시대 로마 가톨릭교회는 마침내 세속 권력까지 모두 장악했고 극단적인 탐욕과 타락의 화신으로 전락했다. 돈과 권력, 그리고 탐욕이 중세교회를 지배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탐욕의 화신으로 전락한 기독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자 징계와 회개를 통한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다. 500여 년이 지난 현재 기독교는 다시 한 번 종교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이 시대 교회는 추악한 권력 투쟁과 부의 축적, 화려한 성전 건축, 세습, 거짓, 성추행 등으로 더렵혀진 탐욕의 화신이 되었다. 형제와 이웃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나누어 주기는 커녕, 남의 것을 도적질하고 착취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이 시대는 남의 교회 교인들을 빼앗아 예배당을 채우는 교회들, 성도들의 권한을 박탈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목회자들, 목회자와 성도들의 권한을 누르고 자신들의 성을 쌓는 장로들, 예배당 건축을 위해 십일조와 헌금을 강요하는 설교들, 부와 명예와 성공을 위해 신앙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성도들로 넘쳐난다. 이 싸움의 승자들은 스스로 면죄부를 발행하고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와 사랑을 선포하며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이런 교회에 소망이 있을까?

거짓과 탐욕에 저항하는 교회가 살아남는다

이 시대 교회는 쇄락과 멸망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다. 거짓과 탐욕의 화신으로 전락한 교회는 이미 사회 전반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다. 차세대 청소년들이 기독교를 외면하고 적대적인 반기독교 세력에 합류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 흐름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멸망으로 치닫는 기성교회의 흐름에 편승한 교회들은 한 세대 후에 생존할 수 있을까? 거짓과 탐욕의 화신으로 전락한 교회들의 현실을 살펴보면, 그 미래가 자명해진다. 거짓과 탐욕에 사로잡혀 분쟁과 갈등, 그리고 분열의 과정을 거친 교회들은 예외없이 차세대와 청소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장년과 노년만 남아 있는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한다. 이런 교회들의 수명은 짧게는 수년에서 길어야 20-30년이다. 이것은 대형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파멸로 향하는 구원열차(?)에 탈출구는 없을까? 이 시대의 현실에서 답을 찾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고 역사로 돌아가야 한다. 죄악의 노예로 신음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다시 신앙을 회복하고 승리하는 교회가 되었는지 성경은 무수한 사례를 통해서 증거한다. 세상을 이끄는 근원적인 힘인 거짓과 탐욕에 굴복하지 않고 생명을 걸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그 백성과 시대를 구원하셨다. 중세시대를 지배하던 절대권력인 로마교황청의 거짓과 탐욕에 맞서 싸운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새로운 시대, 개혁된 교회를 이 땅에 허락하셨다.

영혼과 신앙은 돈과 거짓으로 살 수 없다. 오직 사랑과 진리와 신뢰로만 얻을 수 있다. 기독교는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사랑과 진리로써 천국으로 인도하는 종교이다. 기독교는 그 본연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거짓과 탐욕을 버리고 진리와 진정한 나눔과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이 시대 교회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 시대의 거짓과 탐욕에 저항하는 소수를 통해 하나님은 다음 시대를 예비하고 새로운 부흥의 길을 여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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