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의료원 원목실 엮음 / 고진하 지음 / 넥서스CROSS

 
2013년 7월부터 연세의료원에서는 ‘기도로 함께하는 의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수술실에서 의사가 환우를 위해 기도하는 프로젝트이다. 불안에 떨고 있던 환우들이 의사의 기도로 안정을 찾고 편안하게 수술을 받으면서 치료 효과도 커졌다.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원목실의 한인철 목사는 수술이나 중증 치료를 받은 분, 생존가능성이 높지 않은 상황에서 거의 완치를 경험한 분들의 경험을 모아 고진하 시인 목사에게 집필을 의뢰하여 이 책을 출간하였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넘겨받은 기초 자료들을 읽으면서 아픔이 전이되어 같이 아팠고, 쿵쿵, 다시 뛰는 생명의 북소리를 들었고, 환우들이 겪은 아픔이 한 송이 우주의 꽃으로 보였다고 말한다. 쾌유, 혹은 완치라는 기적을 연출하는 생명의 마법사는 보이지 않는 그분만이 아니라, 환우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처럼 함께 아파하고, 생명의 존엄을 자각하고 살아가는 의사, 간호사, 간병인, 교역자, 부모 가족 모두라고 말한다.

책에 담긴 30편의 글은 살아나기 어려운 상태에서 회복된 기적에 대한 간증기이기도 하고, 인격과 신앙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프로젝트의 수혜를 입은 환우와 한인철 원목실장의 인터뷰도 있고, 원목 이야기도 있고, 의사 이야기도 있고, 말기암 선고를 받은 목회자의 고백과 결단이 담긴 설교문도 있다. 아래 소개하는 저자의 시 한 편도 실려 있다.

아프기 전에는

아프기 전에는 인생이 뭔지 몰랐어.
아프기 전에는 먹고 마시고 말하고 보고 듣고
걷는 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어.
몸이 아파 응급실에 실려 가고 나서야
몸이 아파 덜컥 중환자실에 눕고 나서야
산다는 것이 뭔지 조금 어렴풋해지더군.
숨을 쉴 수 없어 호흡기를 매달고 나서야
죽는다는 것이 환한 실감으로 다가오더군.

절망하기 전에는 인생이 뭔지 몰랐어.
절망하기 전에는 왜 심장이 뛰는지
왜 밥을 먹는지 왜 똥을 누는지
왜 두 손 모아 기도해야 하는지 몰랐어.
별을 보며 절망의 밤을 막막히 지샌 뒤에야
벽을 보며 통증의 괴로움으로 몸부림친 뒤에야
생로병사가 비로소 인생인 줄 알겠더군.
죽음의 문턱을 몇 번 넘나들고 나서야
숨을 주신 생명의 마법사가 뉘신지 알겠더군.

무릎 꿇기 전에는 인생이 뭔지 몰랐어.
무릎 꿇기 전에는 왜 동트는 태양이 삶의 희망인지
왜 고통 속에 눈뜨면서도 감사해야 하는지
왜 우리가 겪는 아픔을 서로 나누어야 하는지 몰랐어.
저 어둠의 심연으로 내려가 어둠과 손 잡아본 뒤에야
영원한 생명의 빛이 뉘신지 알았어.
무릎의 무릎을 꿇고 내 삶이
사랑하는 이의 장중에 있음을 알게 된 뒤에야
내 인생이 우주의 꽃임을 알았어.

그래, 난 아무 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야.
지금도 쿵쿵 뛰는 내 심장을 걸어 다니시는,
육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붉은 혈관 속을 산책하시는 그분을 느끼기에.

저자는 강원도 시골집 대문간에 써서 붙여 놓은 ‘흔한 것이 귀합니다!’란 경구를 온몸으로 살아내려 노력한다. 틈틈이 가까운 산이나 들로 쏘다니며 잡초를 뜯어 반찬으로 만들어 먹으면서, 미래 식량의 대안이 될 야생초 연구를 하고 있다. 주일이면 ‘한살림교회’에서 젊은 그리스도인들과 성경과 도덕경, 장자 등의 경전을 함께 읽으며 마음공부를 하고, 나머지 6일은 텃밭을 가꾸거나 낡은 한옥 수리를 하며 몸 공부에 진력하고 있다. 이외의 저서로는 『얼음수도원』, 『수탉』, 『거룩한 낭비』 등의 시집, 『오늘, 행복하여라』, 『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 우파니샤드 기행』 등의 산문집과 다수의 번역서가 있다.

(본문 중에서)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숱한 환우들을 만났다. 치료를 마친 후에도 나는 한동안 환우들을 보기 위해 병원을 찾아가곤 했다. 그때마다 느낀 것은 자기를 괴롭히는 병과 삶에 대한 환우들의 반응이 참으로 다양하다는 것. 병원생활을 오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분노와 우울의 반복으로 감정적인 어려움을 겪는 분도 있었고, 반대로 방금 청천벽력 같은 진단 결과를 통고받고서도 낙천적인 삶의 태도로 살아가는 분도 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세상과 자신의 삶을 비관과 분노의 눈길로 바라보면서,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사귐 역시 꺼렸다. 후자의 경우는 사람들과의 소통을 즐기며, 지금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나처럼 병을 앓는 사람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고 싶었다. 발병 후 자신을 옥죄는 가장 근본적인 고통의 원인이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들도 분명 조금 더 힘을 내어 싸울 수 있으리라 믿었다....지금 고백하는 것이지만, 투병 과정을 통해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은 단순히 병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처럼 유한한 존재가 나보다 크신 분의 뜻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마는, 하나님은 나를 통해 내 생의 큰 그림을 그리시기 위해, 나에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감내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기지 못할 것이라면 주시지도 않으셨을 것이기에, 내게 주어진 순간들을 열심히 헤쳐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받들어 사는 것이라 생각했다.

세상에 고통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모두가 각자 크기도 모양도 다른 저마다의 생을 짐 지고, 앞으로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 아니겠는가. 흔하지 않은 병으로 투병했던 나의 짐은 다른 사람들의 짐보다 조금 특별하고 무거웠던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

그때가 언제일지 모르지만, 생의 긴 여정을 마칠 때가 되어 짐을 내려 놓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나 자신에게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랑스럽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았노라 말할 수 있길 바란다. 그래서 오늘을 내 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되, 만일 내일이라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동전의 양면 같은 삶과 죽음을 주님에게 다 맡기고 힘차고 즐겁게 살아가려고 한다. 앞으로 또 살아갈 날들은 분명 신비롭고 아름다운 것임을 믿기 때문에.‘(김재인 대학생)

‘오랜 투병과정을 통해 나는 이전의 것들과 결별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은총을 입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아프기 전에는 아픈 사람들을 보면 그냥 형식적으로 위로의 말을 했을 뿐이었다. 이제는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기보다는 하루하루 내 삶을 비춰 보는 거울이 되었다.’(김경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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