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 뜨거운 날씨였다.

30년 가까이 캘리포니아에서 살았다. 해마다 화씨 100도 넘는 날을 열흘 남짓 보내야만 여름을 넘길 수 있다. 그나마 습도가 없어서 그늘에만 있으면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지낼 수 있어 다행이기는 하다.

지난 주 어느 날은 내가 겪은 여름 중에서 최고의 온도를 기록했다. 106도. 놀랄 만한 온도였다. 아침은 서늘해서 엷은 긴 소매를 입었는데 정오가 가까워지자 더워지기 시작하더니 두세 시가 되자 온도계는 예고했던 106에 도달해 버렸다. 일교차가 큰 만큼 갑자기 높아져버 린 온도에 적응하기가 어렵기만 했다. 에어컨을 사용할 수 없는 가게에는 대신 워터쿨러가 있지만, 100도가 넘은 온도엔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끈적끈적한 바람만 내보내고 있었다.

찬물로 다리와 팔을 씻고 물기를 닦지 않고 마르면 다시 씻기를 반복했다. 찬 음료수를 마시고 수박 조각을 입에 넣기를 몇 번 했던가. 온 공간을 싸고 있는 뜨거운 기운은 물러가지 않았다. 배만 부르고 불편해서 더 이상은 어려웠다. 움직임을 최대로 줄이기 위하여 앉았다.

순간, 늘어진 내 모습과 대조를 이루면서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렸다. 간신히 손을 뻗어 수화기를 들었다.
“엄마! 많이 덥지요? 미안해요. 나만 시원한 곳에 있어서요.”아이의 목소리였다. 발딱 일어났다. 늘어진 몸이 가쁜해졌음은 물론이다. 늘 바쁘게 사는 아이. 더군다나 한참 일을 하고 있어야 할 시간에? 아이는 차로 두 시간 떨어진 바닷가 시원한 동네에서 일을 하고 있다. 어떻게 이곳이 더운 줄 알았느냐는 내 질문에 여름엔 이 동네 날씨를 날마다 살핀다는 대답이다.

무척 기뻤다. 필요한 일이 없을 땐 연락 한 번 없던 아이이질 않은가! 뜻하지 않게 받은, 채 오 분도 되지 않은 짧은 통화는 106도의 더위도 이길 수 있을 만큼 큰 기쁨이었다. 무심한 듯한 아이를, 어려운 생활에서 바쁘게 살아야하는데 어미에게 쓸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하고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스스로에게 말하곤 했다, 놀랍게도 아이가 어미를 생각하고 날마다 이곳의 날씨를 점검하고 있다니 흐뭇하기만 했다. 채념을 했기에 행복감이 더했나보다. 아이의 맘속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예기하지 못했던 시간에 걸려온 전화는 그렇게 나를 기쁘게 했다.

며칠이 지났건만 큰 보물을 찾은 것마냥 뿌듯해 하고 있는 오늘, 아침 QT의 본문 중에서 내 눈길을 빼앗아 가는 구절이 있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옙 5:11).

무엇을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묵상하게 되었다.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할 무렵, 며칠 전 뛸 듯이 기뻤던 아이와의 통화가 생각났다. 결코 거창한 것이 행복을 만들지 않았다. 아이의 작은 관심을 보았을 뿐이다. 날마다 어미를 잊지 않았고, 심한 더위와 싸우고 있을 그 시간에 살짝 물어온 안부 전화 한 통이 만든 행복감은 106도라는 온도조차 물리칠 수 있게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어미의 행복 만들기는 쉽기만 했다.

능력 없고 부족한 사람임을 나보다도 더 잘 아시는 나의 하나님의 행복도 내 속에 들어있는 한 줄기,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보여 드리기만 해도 기뻐하시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곳의 날씨를 점검하는 아이, 마음에 분명 어미가 있었던 것처럼, 나의 마음속에도 하나님이 계시게 해야겠다. 그리고 예기하지 않았던 시간에 불쑥 걸려왔던 아이의 전화처럼 시시때때로 주님과의 대화. 곧 기도하는 습관을 길러보리라.

주신 은혜를 감사드려야겠다. 순간 순간 내딛어야 하는 발걸음의 방향을 여쭙고, 나와 이웃들의 기쁨과 아픔도 말씀드리며, 대화의 폭을 넓혀 보리라.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다짐을 해봤다.

무심하다고 혼자 마음으로 결정해 버렸던 아이에게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법을 106도가 되던 날 배웠다. 그 배움으로 인해 또 행복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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