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그냥 놓아 주지 않았습니다. 왜 바로는 그토록 두들겨 맞으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한사코 거부하고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당신의 백성이니 당신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서 경배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바로는 그들이 자신의 노예이므로 애굽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강퍅해진 바로는 재앙이 계속되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 주지 않고 오히려 타협하자고 합니다.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는 타협을 제시했다가 여덟번째 메뚜기 재앙을 당하고도, 바로는 세 번째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와 너희의 어린 아이들을 보내면 야훼가 너희와 함께 함과 같으니라 보라 그것이 너희에게는 나쁜 것이니라 그렇게 하지 말고 너희 장정만 가서 야훼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가 구하는 바니라 이에 그들이 바로 앞에서 쫓겨나니라"(출 10:10-11). 한 마디로 어린아이는 놔두고 어른 남자들만 가라는 것입니다.

사단의 계략이 바로를 통해 드러납니다. 장정들은 가되 어린 것들은 애굽에 남겨 두라는 선언입니다. 부모들은 광야에서 희생을 드리고, 자식들은 애굽에서 볼모로 지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핍박 중에도 나날이 부흥하는 중국 교회들이 바로의 타협과 같은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18세 이상이 되어야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으며, 그 이하는 부모일지라도 교회에 오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중국의 법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가 급성장하는데도 교회학교가 없거나 그 힘이 약한 곳이 바로 중국입니다. 부모와 자녀를 분리해 신앙을 무력화시키고, 신앙의 계승을 막겠다는 사단의 계략입니다.

바로는 어린아이를 잡으면 미래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사단은 아이들로 하여금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고 자기의 영향력 아래 묶어 두는 작전을 계속 수행 중입니다. 가정과 나라의 미래는 자녀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자녀들을 사단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  미래에 자신의 힘을 펼치려는 것입니다.

오늘날 왜 아이들이 참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왜 자녀들과 부모가 함께 예배드리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단이 세상 풍조와 문화의 영향력 안에 우리 아이들을 가두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TV, 컴퓨터, 게임, 스마트폰의 영향 때문에 눈으로 보는 것에만 익숙해져서, 루키즘(lookism-외모지상주의)이라는 가치관으로 세상을 판단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보이는 것만 중시하고 끊임없이 서로를 비교하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유혹하고 비교하게 만들어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은 오래 전부터 사단이 사용한 방법이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넘어뜨릴 때 사단은 전면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단이란 단어 자체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뱀을 앞세워, 즉 루키즘을  이용해 아담과 하와를 결정적으로 넘어뜨립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에서 보듯이, ‘결코’라는 강조법과 ‘하나님과 같이 되어’라는 비교급을 써서 사람을 무너뜨립니다. 어떤 사람이든 인격이나 실력, 소유와 능력을 비교당하면 참지 못합니다. 사람은 비교에 약합니다. 또한 유혹에도 약해서 눈앞에 보이는 것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합니다(창 3:6). '저것만 있으면, 저것만 소유하면, 저것만 내 것으로 만들면' 식으로 사단은 계속 내면에서 부추깁니다. 사단의 핵심 전략은 하나님과 교회, 예배 신앙으로부터 사람을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이후로 사단은 오늘날까지 트렌드와 문화라는 이름으로 다음 세대들을 점령해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만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요즈음 모든 사람들이 스마트폰의 영향력 아래 있습니다. 스마트폰이 긍정적인 역할도 하지만 양면성이 있습니다. 다음 세대들이 스마트폰에 중독되면 음란성과 폭력성이 늘어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예배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집니다. 학습하고 생각하는 능력을 담당하는 전두엽이라는 뇌가 망가지고, 결국 뇌가 변형되어 생각하는 기능이 떨어집니다. 또 가족간의 대화가 단절되고 성장기에 중요한 영육간의 건강의 균형이 깨어집니다. 시각적인 영향을 계속 받으면 읽고 듣는 능력이 상실되고 결국 인간성 자체가 없어집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창조성이 사라져서 하나님의 형상이 망가집니다.

이제는 다음 세대 싸움입니다. 누가 다음 세대를 차지하느냐 하는 것은 첨예한 영적 전쟁입니다. 창세기에나오는 바로의 말은 오늘날 자녀들의 신앙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가정과 교회와 학교의 지도자들에게 두려운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13세 이전에 신앙 교육을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자녀의 영혼을 사단에게 빼앗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구세군 창시자의 어머니 캐더린 여사는 8남매를 신앙인으로 잘 키운 분으로 유명합니다. 사람들이 캐더린 여사에게 물었습니다. “우리는 한두 명의 아이도 키우기 힘든데, 당신은 어떻게 8남매를 하나님의 사람들로 키우셨습니까? 그 비결을 알려 주십시오” 여사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다른 거 없습니다. 마귀보다 한 발 앞서서 손을 쓴 것밖에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아이가 성장하면서 나쁜 습관을 배우기 전에 좋은 습관을 먼저 배우게 했다는 것입니다. 나쁜 말을 배우기 전에 긍정적이고, 좋은 말을 먼저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나쁜 지혜를 사단이 가르치기 전에 선한 지혜, 남에게 도움 주는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를 한 발 앞서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일단 마귀의 영향권 안에 사람이 들어가면 거기서 빠져 나오기까지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알아서 하겠지 하고 방임할 것이 아니라, 자녀가 어릴 때부터 적극적으로 신앙 교육을 해야 합니다.

어쩌면 기독교 아동기관이나 교회가 좋은 시설을  만들거나 프로그램을 개발해도 어린이들이 찾지 않는 시대가 올지도 모릅니다. 지금 모든 것을 걸고, 아니 목숨까지 걸고 다음 세대에 신앙을 전수하지 않는다면 기독교의 미래는 불투명해질 것입니다.

신앙은 영혼육이 함께해야 오래 갑니다. 어렸을 때부터 습관이 들어야 평생 갑니다. 유대인들은 모든 것을 걸고 자녀들에게 신앙 교육을 하고 삶의 본을 보여 주어 그들의 미래를 만들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심어 주어야 할까요? 성경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하고 강조합니다. 그 길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예수님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다음 세대의 주역인 자녀들에게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확실하게 심어 주어서 사단에게 빼앗기지 않고 승리하여 미래가 열리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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