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터리 재판

조선으로 들어오거나 외부로 나가는 모든 편지들은 철저한 검열을 받았다. 셔우드와 메리안은 시베리아 감옥에 갇힌 한 러시아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자기 가족과 이별하기에 앞서 비밀 암호를 약속했다고 한다. 식량이나 다른 물품들을 구하기 어려울 때는 녹색 잉크로 편지를 쓰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난 지 얼마 후 가족들은 마침내 기다리던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에는 유형지에서 얼마나 충분한 물자들을 구입할 수 있는지 하나하나 그 물품들의 이름을 열거해서 적고 있었다. 그러나 편지의 마지막에 구할 수 없는 단 한 가지의 물품은 녹색 잉크라고 간단히 덧붙여 적었다고 한다.

셔우드는 최근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 어머니께 편지를 쓰려고 책상에 앉으니 이 러시아 작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1940년 9월 12일, 셔우드는 어머니께 은밀하게 조선의 소식을 전하려는 뜻에서 편지를 썼다.

‘어머니는 제가 소년 시절 즐겨 읽었던 페니모어 쿠퍼의 책 중 한 제목을 기억하시겠지요. 메리안과 제게 그 내용과 같은 일이 생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화진포 별장에 불어 닥쳤던 폭풍에 이어 이곳에서도 세찬 폭풍이 한 차례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날이 개고 있으니 앞으로는 맑은 날씨일 것으로 믿어도 괜찮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이곳은 확실히 태풍의 계절입니다. 이 태풍이 언제, 어떤 모양으로 불어 닥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어머님이 보내신 카드는 필리스의 생일에 도착했습니다. 저희들은 어머님이 건강하시다는 소식을 받게 되어 매우 기뻤습니다. 저희는 필리스를 위해 간단한 생일 파티를 열었습니다. 이렇게 생일 축하를 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가정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소중한 축복으로 여겨집니다.’

셔우드의 어머니는 이 편지를 받아본 후 편지 모서리에 다음과 같은 글을 덧붙여 놓았다.

“셔우드는 두 번에 걸쳐 스파이로 몰렸던 사건을 편지에 썼으나 나는 그 연유를 알지 못했다. 내가 뉴욕 신문에 난 전보 기사를 읽지 않았다면 셔우드가 편지에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전혀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여러 사건이 잇달아 일어난 불행 중에도 결핵 크리스마스 실 운동만은 셔우드를 기쁘게 했다. 일반인들도 결핵을 더욱 잘 이해했고 해가 갈수록 이 운동은 빠른 속도로 확대되어 갔다. 셔우드도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셔우드는 자기가 맡았던 일들의 많은 부분을 열성적인 위원회에 넘겼다. 이제 환자 치료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평화도 오래 가지 못했다.

영국 왕실의 그림도 자주 그렸던 유명한 화가 엘리자베스 케이드는 1940년과 1941년도의 크리스마스 실의 그림을 그려 주었다. 색동옷을 입은 두 명의 귀여운 조선 아이들을 그린 것으로 배경은 눈 쌓인 산이었다. 이 도안은 정부에서도 허가를 해주었고 모든 사람들도 흡족하게 여겼으므로 통과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허가’란 셔우드의 생각이었다. 가장 중요한 권력자로 부상한 일본 군부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전 경고도 없이 헌병대에서는 셔우드가 보급하려고 모든 준비를 끝낸 크리스마스 실 상자들을 압수해갔다. 독수리의 눈 같은 헌병대의 눈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몇 장의 실뿐이었다.

너무나 야만적인 행위에 셔우드는 마치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셔우드는 정신을 차린 다음 해명을 요구했다.

육군에서는 이 도안이 국방 안보의 규정을 어겼다고 보았다. 첫째로 조선 아이들을 지적했다. 어째서 천진한 아이들이 국방을 위협한다고 생각했는지 셔우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아이들이 일본의 막강한 군대에 무슨 해를 끼친단 말인가?

다음으로는 야만스런 태도로 눈 덮인 흰 산과 그 밑에 있는 마을을 지적했다. 높이 20m 이상 보여 주어서는 안 된다는 육군의 규정을 알지 못했느냐고 힐책했다. 헌병들은 실이 그대로 보급되었다면 셔우드는 법정에서 형을 받았을 것이라고 했다.  실이 보급되기 전에 압수한 것은 바로 셔우드의 입장을 유리하게 해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셋째로는 실에 표시된 ‘1940-1941’년이란 서기 연호를 삭제하라는 것이었다. 1940년은 일본 건국 2600년에 해당하는 해다. 위대한 일본 제국이 건국되고 한참 지나서 서기 연도가 생겼다는 것이다.

셔우드는 2600년이라는 일본 연도를 결코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들의 감정과 대립되지 않는 대안을 생각해냈다. 실 보급 운동이 시작된 지 9년이 되었다는 의미로 ‘NINETH YEAR’로 대치하겠다는 셔우드의 안은 성공했다.

다음 난관은 감수성이 예민한 케이드 양을 설득해 도안을 고치는 일이었다. 케이드 양은 셔우드의 집에서 손님으로 묵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셔우드 가족 요리사의 딸을 그렸는데 조선 혼인식에서 풍습대로 눈을 아래로 깔고 있는 사랑스런 신부의 모습을 그렸다. 그때 배경에 조선 병풍을 그리면 어떻겠느냐고 셔우드가 제안했지만 그녀는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까스로 그 안이 채택된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화가는 자기가 만족하게 생각하여 완성한 그림을 고치라고 하면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셔우드는 가장 외교적인 방법으로 설득했지만 케이드 양은 그의 예상대로 펄펄 뛰었다. 셔우드는 그녀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셔우드는 아예 그 그림을 포기하고 다른 화가에게 부탁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때 케이드 양이 겨우 배경을 수정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마지못해 응해주 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잊지 않고 한 마디 강조했다.

“그 대신 내 이름을 이 수정한 그림에는 절대로 내놓을 수 없어요.”

셔우드는 그녀의 뜻에 동의했다. 수정한 그림도 멋있었다. 색동옷을 입은 소녀와 소년이 예술적인 조선 대문 앞에서 서 있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먼 산이 대문을 통해 그대로 보였다. 이건 케이드 양이 일부러 짓궂게 한 것인데도 육군검열관은 이를 알지 못했다. 케이드 양의 기분도 어느 정도 맞추어  주고 육군 검열관도 만족시키게 되자 서둘러 YMCA 인쇄국에 일을 맡겼다. 시간이 매우 촉박했다. 그러나 YMCA에서 서둘러 준 덕분에 크리스마스에 댈 수 있게 인쇄가 끝났다. 이 실은 2차 대전 중에 조선에서 만든 마지막 실이 되었다.

사사끼 씨가 미리 알려 주기는 했지만 막상 육군 헌병들이 셔우드의 집에 도착하자 셔우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가택 수색을 하러 왔던 것이다. 셔우드는 “경찰이 이미 다 수색했으나 법에 저촉될 증거는 하나도 없었으니 당신네들도 헛수고할 게요”라고 응수했다. 경찰이 선수를 쳤다는 말을 들은 헌병들은 화가 나서 얼굴들이 시뻘개졌다. 그들이 안절부절못하다가 떠날 때 셔우드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들이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사사끼 씨가 다시 셔우드 가족을 방문했다. 그의 얼굴은 전과 달리 희색이 만연했다.

“좋은 소식 한 가지와 나쁜 소식 한 가지를 가져왔습니다. 육군 헌병대에서는 마침내 당신들에 대한 스파이 혐의는 포기하고, 해주 법원으로 이 건을 이첩시켰습니다. 이것은 희소식입니다. 당신들의 생명은 이제 더 이상의 위협을 받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좋지 않은 소식은 경제 문제와 관계된 겁니다. 재판이 있기 전이라도 판결이 날 수 있습니다. 이런 재판을 당신들은 ‘캥거루 코트’라고 부르겠지요. 당신들 두 분이 3개월 감옥살이를 하든지, 아니면 $1,000를 준비해 지불해야 합니다. 육군 헌병대는 체면이 크게 손상당했습니다. 제시할 증거는 없었지만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당신네 건을 사법재판소에 넘긴 겁니다. 판사는 형을 가볍게 주면 육군에서 제소할까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징역 아니면 중한 벌금이 내려질 것입니다.”

이 소식은 참으로 셔우드와 메리안을 놀라게 했다. 셔우드와 메리안은 자유가 귀함을 알고는 있지만 이제 어디서 그 많은 돈을 구해야 할지 난감했다. 셔우드와 메리안을 도와 줄 수 있는 친구들은 대부분 조선을 떠나고 없었다. 셔우드와 메리안은 아직 계류 중이므로 일본법에 의하면 무죄가 인정될 때까지는 죄인인 셈이었다. 해주 지역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으니 출국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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