Ⅶ. 송 영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에 괄호 속에 든 기도는 한글개역성경 마태복음(마 6:13)에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끝맺음을 하고 있다.

이 부분을 송영(The Doxology) 혹은 영광송이라고도 한다. 주기도문에서 송영은 그 기도의 탁월성과 완결성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주기도문을 연구하는 학자들 가운데 '칼빈'은 이 송영의 부분을 "생략하지 않는 것이 적합하다."라고 했다.

우리는 기도를 드릴 때 필요한 것을 구할 뿐 아니라, 마땅히 감사와 찬양을 기도의 필수적인 요소로 담아야 한다. 때문에 주기도문에 첨가된 송영은 하나님과 교통케 하는 영혼의 합당한 언어들이다.

웨스트 민스터 소요리 문답에서는, 주기도문의 마지막 구절이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는가? 주기도문의 마지막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할 때에 하나님만 믿고 또 기도할 때에 그를 찬송하여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다라고 가르친다.

또 "우리가 우리의 원하는 뜻의 증거와 들으실 줄 아는 표로 아멘 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이제 우리는 예레미아스(Jeremias)가 "기도가 간구로 끝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고 하여 주기도문에 송영(영광송)이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처럼, 마지막 송영을 통하여 기도로서 완벽하게 보여 주는 점들과 그 속에 있는 각 단어들과 어휘 전체를 마음으로 깊이 묵상하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주기도문과 함께 사용되고 있는 송영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주기도문 본문의 한 부분인가? 아니면 후대에 첨가된 것인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역성경에는 송영이 괄호와 함께 마태복음의 주기도문 본문 안에 포함되어 있고 그 대신 성경 하단에 "고대 사본에 이 괄호 안의 구절이 없음"이라는 주(註)를 달아 두고 있다. 누가의 본문에는 그 기록마저도 생략되어 있다.

이 점에 대하여 사본상의 증거들을 본문 비평 기준을 가지고 평가하면서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있다.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는 사본상의 증거는 송영이 없는 본문이 사본의 질에 있어서나, 광범위한 지역의 분포에 있어서나 송영을 가진 본문보다 훨씬 타당하게 후대에 첨가된 간구로 강력하게 지지를 얻고 있다.

현대 신학자들 중의 한 사람인 메쯔거(Metzger)는 송영이 없는 본문이 마태의 본래 본문으로, 그리고 송영은 뒤에 첨가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송영이 있는 주기도문이 성경 본문에 속한다는 주장을 제외시켜 버리려는 태도를 가졌던 역사도 있었다.

암브로시우스(Ambrosius)는 그의 저서 중 성례전에 관하여(De Sacaramentis)에서 송영(영광송)이 없는 주기도문을 수록하고 있고 그의 같은 책에서 그 주기도문을 각 청원에 따라서만 해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해서 주기도문과 함께 사용 되어온 송영을 제거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수용할 수 없다고 본다.

하르너(P. B Harner, Understanding The Lord's Prayer)의 말을 빌리면, 초기의 본문의 증거는 예수님 자신이 주기도문을 주셨을 때 송영을 포함시키지 않으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주기도문을 자유롭게 형성된 어떤 기원으로 결론 내릴 수 있기를 기대하셨다는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 기도문이〈어떤 송영>으로 끝나야만 하는 것이 유대 종교의 원리였다. 따라서 예수님은 주기도문이〈시험〉이나〈악〉이란 말로 끝나기를 바라시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분명히 그는 제자들 스스로 하나님에 대한 적절한 찬양으로 주기도문을 끝내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송영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구약과 유대 종교에 있는 그들의 부유한 의식적 유산을 활용했을 것이다.

예레미아스(Jeremias) 역시 제자들과 초대 교인들이 주기도문을 사용하면서 당대 유대 관습을 따라 어떤 송영과 함께 주기도문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초대 교회사를 연구하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는 디다케(Didache)를 보면, 오늘날 주기도문의 송영과 같은 유형이 있으나 거기서는 "나라"가 빠지고 "아멘"이 없다. 그러나 이런 점은 주기도문 송영의 문구에 있어서는 같지 않으나 그 기능상으로는 조금도 흐려짐이 없다.

여기서 송영을 제외시키는 데 찬성하는 자들의 견해는 역사적 데이타의 근거가 없는 추측이나 비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비록 예수님께서 송영이 없는 주기도문을 주셨다고 하더라도 제자들과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유산과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하는 유대적인 관습, 성경기자들의 관습처럼, 우리도 송영과 함께 주기도문을 진심으로 드리는 자세가 옳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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