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다

21세기 교회를 조망해보면 나라와 민족과 지역을 막론하고 온갖 이단과 교단과 교파와‘주의(ism)’가 난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교회로 국한해도 신천지, 구원파, 하나님의 교회(안상홍) 등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이단들이 활보하고 있다. 정통으로 분류되는 교회 내에도 더 이상 역사적, 성경적 기준에서 정통으로 인정하기 힘든 각종‘주의(ism)’와 ‘사이비 복음’이 대세로 자리잡고 있다. 종교다원주의, 현세주의, 물질만능주의, 기복신앙, 번영신학 등이 역사적 정통 신앙을 밀어내고 있다. 목회자들 사이에서조차 성경이 말하는 원색적인 복음이 외면당하는 현실이다. 현 세대의 조류와 기성교회의 흐름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거짓 복음과 이단이 활보하는 현실에 대한 근원적 책임은 기성교회에 있다. 이천 년 기독교 역사가 보여 주는 교훈은, 이단이 반드시 정통교회가 타락할 때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정통교회의 어떤 잘못, 어떤 병폐가 이단과 사이비의 등장을 부추겼는지 알아야 한다.

믿음에 대한 오해들

지난 호의 글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자’에서 밝혔듯이, 종교개혁은 믿음과 행함에 대한 중세교회의 잘못된 주장, 즉 ‘행위구원’과 ‘공로주의’에 대한 역사적 정통신앙의 혁명적 반격이었다. 종교개혁의 본질은 ‘믿음과 행함’에 대한 성경적, 역사적 정통 기독교의 회복이다. 따라서 우리는 과연 현대교회가 ‘믿음과 행함에 대한 성경적, 역사적 교훈을 간직하고 있는가’를 질문해 보아야 한다. 먼저 현대교회가 가르치는 믿음의 실체를 파헤쳐 보자.

(1) 믿음은 ‘지적 동의’가 아니다. 믿음에 대한 현대교회의 대표적인 착각은 믿음을 ‘지적 동의’와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믿음의 본질은 지적인 동의가 아니다. 믿음은 신학과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를 훨씬 뛰어넘는 생명과 삶에 대한 근원적이고 혁명적인 사건이다. 믿음은 세상의 그 무엇으로 대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영원한 세계에 속한 것이다. 온 우주보다 귀한 믿음을 단순한 ‘지적 동의’로 격하시킨 것은 근·현대교회의 오만과 무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의 근·현대 문명이 이성주의와 합리주의에 기초한 문명임을 감안하더라도, 근·현대교회가 이성주의와 합리주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한 것은 정통 기독교 신앙을 얄팍한 지성으로 재단하여 학살한 것과 다름이 없다. 현대교회는 믿음을 성경 공부와 성경 지식 혹은 이런 지식에 대한 동의와 동일시하고 있다. 이런 지식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 우리는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다. 지적 동의에 근거한 신앙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 세상을 변혁하고 영혼과 삶을 구원하는 믿음과는 거리가 멀다.

(2) 믿음은 자기 확신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교회에서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간다고 확신하십니까”라는 질문이 회자되고 있다.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이 질문을 통해 구원의 확신과 신앙에 대한 지적인 확신을 강조하고 있다.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어떤 의도로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문제이다. 이 질문에 확답을 하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관련 성경구절들을 설명하고 확신을 강요하는 데서 그 정체가 드러난다. 이 질문의 맹점은 믿음을 자기 확신과 동일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즉, 관련 성경구절에 근거하여 천국과 구원에 대한 자기 확신만 있으면 그것이 믿음이라고 간주하는 중대한 오류를 범한다. 이런 확신에 근거해 온갖 죄악을 일평생 저지르면서도 회개치 않고, 자기 확신에 근거한 믿음의 정당화를 펼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접하고 있다. 믿음에 대한 확신은 인간의 의식적인 노력에 의한 세뇌나 자기 암시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주어지는 보배로운 선물이다. 자기 확신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인격적인 역사의 결과로 주어질 때, 우리 안에 견고한 닻을 내린다.

(3) 믿음은 종교적 행위나 관습이 아니다. 현대교회에 만연한 잘못된 인식 중 하나는 믿음을 종교적 행위 혹은 관습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도, 성경 읽기, 헌금, 봉사, 전도 등을 믿음과 동일시한다. 목회자들조차 이렇게 가르치고 확신한다. 문제는 이런 착각 속에서 신앙 생활을 할 때, 신앙 생활은 종교 생활 혹은 교회 생활로 변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 생활은 삶을 바꾸고, 관계를 변화시키며, 생명을 구원하지만, 종교 생활 혹은 교회 생활은 어떤 힘도, 변화도, 생명도 없는, 죽은 것에 불과하다. 예배 드리면서 서로 싸우는 교회, 교회 다니면서 온갖 죄악을 죄책감 없이 범하는 기독교인, 사랑을 외치면서 이기적인 행위에 몰두하는 성도, 세상의 지탄을 받는 기독교 등은 죽은 종교 생활, 생명이 없는 교회 생활의 부산물이다. 현대교회는 성도들에게 참 믿음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죽은 종교적 행위와 관습을 전수하고 있다.

참 믿음이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본질은 ‘생명’이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을 통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 즉 영생이 주어진다. 우리 안에 독생자 예수와 성령께서 내주하신다.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다. 즉, 믿음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인격적 관계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날마다 순간마다, 그리고 일평생 주님과 동행하는 인격적 관계가 지속되어야 한다. 주님과의 변함없는 인격적 관계의 지속이 믿음의 본질이다. 주님을 더 깊이 사귀고 알아갈수록 우리는 주님을 닮아갈 수밖에 없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지속될수록 우리의 인격과 신앙이 성숙해진다. 그 분명한 열매가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드러나기 시작한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두 번째 본질은 ‘삶’이다. 믿음은‘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예수를 좇아가는 삶’,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이다. 사도 바울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고 선언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없다면 믿음이 없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을 가지 않는다면, 예수의 제자가 아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지 않는다면, 성령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생활에서 예수 닮은 향기가 나지 않는다면, 나는 아직 주님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삶을 시작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믿음의 마지막 본질은 ‘오래 참음’이다. ‘오래 참음’은 핍박과 고난과 시험과 유혹을 참고 이기는 것이다. ‘오래 참음’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기뻐하고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오래 참음’은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 죄악과 맞서 피흘리기까지 싸워 승리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온갖 핍박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다해 믿음을 지키는 수많은 진짜배기 예수쟁이들의 소식을 접한다. 이들의 절규는 풍요와 죄악 속에 타락한 현대교회의 모습에 대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이다. 한국교회여! 한인교회여! 더 이상 회개와 변화를 요구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하지 말고, 참 믿음을 회복하자. 제2의 종교개혁을 향해 첫발을 내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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