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떠나며

1940년 10월 9일, 미국 정부가 보낸 지시가 셔우드의 라디오에 수신되었다. 그 내용을 미국 총영사인 마시(O. Gaylord Marsh) 씨가 확인했다. 그 훈령은 모든 미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 특히 여성들과 어린이들을 철수시킬 것, 그러기 위해 두 척의 여객선을 11월 6일 제물포에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호놀룰루-샌프란시스코를 항해하던 에스에스 메리포사(SS Mariposa) 호, 에스에스 몬테리(SS Monterey) 호가 이 일을 위해 차출되었다. 또 영국 총영사인 제럴드 핍스(Gerald Phipps) 씨도 월말까지 영국 국적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종용하기 시작했다.

영국 스파이로 몰려 법정에서 형까지 언도 받은 셔우드와 메리안은 즉시 서울에 있는 영국 총영사를 만나 의논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허가 없이는 해주를 떠날 수 없었다. 셔우드와 메리안은 겨우 핍스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셔우드와 메리안은 그에게 벌금을 내는 일이 옳은지 자문을 구했다. 벌금을 지불하면 죄를 시인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죄를 시인하기보다는 오히려 감옥에 가는 편이 나을 때가 있었다.

핍스 씨는 셔우드와 메리안에게 기다리라고 하고 즉시 행동에 들어갔다. 그는 감리교 선교회의 대표인 사우어 씨와 함께 외무성의 오다 씨를 만나 의논했다. 오다 씨는 감리교인으로서 크리스마스 실 사업을 통해 셔우드에게 항상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다. 오다 씨는 군부의 압력만이 재판을 좌우할 수 있다고 말하고는 더 이상 법정에서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전했다. 항소하면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라는 것이었다. 비록 재판이 법적인 절차나 근거를 무시한 엉터리라 할지라도, 빨리 벌금을 지불하고 가능한 한 빨리 출국해야 한다고 핍스 씨는 결론을 내렸다.

11월 중순 에스에스 메리포사 호는 219명의 미국인을 싣고 떠났다. 그중 74명은 감리교인이었으며 여성 해외선교사들도 24명 포함되어 있었다.

셔우드와 메리안은 벌금을 내지 못해 떠날 자유가 없었다. 핍스 씨의 고마운 권고를 듣고 셔우드와 메리안은 즉시 가구, 석탄 등 그들이 가진 물건을 팔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때는 전시여서 물건이 품귀 현상을 빚었던 때라 모두 좋은 값에 팔렸다.

몇 사람의 조선인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의 논을 팔아서 셔우드 가족을 돕겠다고 했으나 다행히 셔우드 가족의 물건들이 팔렸고 모자라는 돈을 빌릴 수 있어서 그들의 도움은 받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육군이 셔우드 가족의 물건을 사는 사람들을 위협해서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셔우드와 메리안은 벌금 총액을 기일에 맞춰 준비할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 셔우드의 가족은 가지고 있던 가장 따뜻한 옷과 담요들까지도 처분해야 했다.

드디어 셔우드는 검사실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셔우드가 자유를 되찾기 위해 ‘몸값’을 가지고 왔다고 말하자 검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셔우드는 그의 책상 위에 기분 좋게 벌금 전액을 내놓았다.

“당신이 돈을 준비해오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소!”

검사는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아침, 당신이 들어갈 감방을 청소하기 위해 소독제를 가져오라고 병원에다 명령했소. 당신도 알다시피 감방은 냄새가 지독하고 벌레들이 들끓고 있어요. 쥐덫도 갖다놓으라고 했지요. 이놈의 쥐들이 잠자는 죄수들 위로 뛰어다니며 사람을 물기도 하거든요. 이런 환경에서는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또 특별한 배려로 우리 사무실의 의자도 두어 개 당신 감방에 갖다 놓으라고 했소. 당신네 서양인들은 오랫동안 바닥에 앉아 있지 못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간이침대를 놓을 자리가 없으니 바닥에서 잘 뻔했소. 그러나 저러나 이젠 그런 준비가 쓸모없게 됐군요.”

셔우드는 그의 사려 깊음에 감명을 받았으나, 그런 친절을 받지 않게 된 점이 더욱 기쁘다고 말했다.

“여하튼, 당신이 우리의 ‘특별 손님’이 되지 않아서 정말로 기쁩니다.”

그는 작별 인사에서 이 점을 시인했다.

셔우드와 메리안은 조선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닥터 쿤즈(E. W. Koons) 같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일본인들로부터 잔인한 고문을 받았다. 닥터 쿤즈는 ‘물 먹이기’라는 특별한 고문을 당했는데, 이것은 강제로 물을 위 속에 부어넣는 것으로서 인간이 인내할 수 있는 한계를 훨씬 넘는 고문이다. 다행히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하기 전에 조선을 떠났다.

셔우드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메리안과 아이들을 얼싸안았다. 마침내 다시 자유를 찾았다고 말하자 메리안은 짐을 싸도 좋으냐고 물었다. 셔우드는 힘있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울에 있는 친구 데이비슨(H. W. Davidson) 씨에게 편지를 쓰려고 서재로 향했다. 그는 셔우드 가족의 미국행 선편을 주선할 수 있었다. 막 편지를 쓰려는데 전보가 도착했다. 셔우드는 감히 봉투를 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재촉했다.

“읽어 봐요! 읽어 봐요!”

언뜻 보니 일본어는 아니었다. 그것은 뉴욕의 선교 위원회에서 온 전보였다.

“인도, 아지머의 결핵 담당 의사로서 즉시 전근할 수 있는지 고려 요망. 전보 답신 요망.”

셔우드는 긴장이 확 풀렸다. 셔우드 가족은 비밀회의를 열었다. 원래 인도는 선택의 순서로 보아 셔우드 부부에게는 맨 마지막 선교지가 될 곳이었다. 그러나 셔우드 부부는 평생을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한 사람들이었다. 선교 활동을 위한 문이 조선에서는 완전히 닫혔지만 인도에서는 열렸으니 하나님께서 셔우드 부부를 택하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셔우드 부부는 인도에 가겠다고 선교위원회에 답신을 보냈다.

얼마 후 선교위원회에서 셔우드 가족의 인도행 결정에 대해 지극히 흡족해했다는 사실을 셔우드 부부는 알게 되었다. 『월드 아웃룩(World Outlook)』이라는 선교 잡지는 ‘두 나라에서 결핵 퇴치’라는 제목으로 두 나라에서 일하고 있는 셔우드 부부의 사진과 기사를 실었다.

결정을 내린 후 셔우드는 데이비슨 씨에게 원래의 부탁과는 다른 편지를 썼다. 인도에 가는 선편 예약을 되도록 빨리 해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그는 전시에 선편을 잡기가 매우 힘들지만 마침 ‘에스에스 프리지던트 잭슨 호’가 세계일주 처녀 항해 도중 12월 첫주에 일본 고베에 기항하므로 봄베이까지의 선실을 예약하도록 힘쓰겠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일은 비교적 잘 풀려가는 듯했다.

아이들은 코끼리와 낙타가 있는 나라로 간다는 사실에 모두 흥분했다. 이때 셔우드와 메리안은 평양 외국인 학교가 문을 닫았다는 통보를 받았다. 메리안은 윌리엄을 데리고 평양에 갈 날짜를 정해두고 있었으나 학교가 폐쇄되는 통에 앞당겨 평양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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