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믿음과 행함에 대한 개신교인들의 이해는 지나치게 극단적이다. 마치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믿음과 행함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모순처럼 보인다. 마틴 루터의 ‘이신칭의’교리 위에 세워진 개신교의 구원론에서 행함이 자리할 공간은 전무하다. 넓게 아량을 베풀어도, 구석진 자리에서 감히 어떤 목소리도 낼 수 없는 노예 혹은 부속물 신세이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행함이 존재해야 할 근거나 이유가 희박할 수밖에 없다. 행함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잉여적 존재이다.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도 전도나 선교에 도움 되고, 천국에서 상급을 더 얻는다는 것 외에 더할 것이 없다. 현세에서 누리는 유익과 행복에 목숨을 건 현대인들에게 이런 주장은 씨알도 안 먹힌다. 냉정하게 말해서, 현대 개신교에서 행함의 존재가치는 말살되었다. 기형적인 현대 개신교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한국교회에서 극단적인 타락과 후안무치(厚顔無恥)가 대세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증거이다.

근원적인 트라우마

개신교 내에서 행함의 존재 근거가 말살된 배경에는 ‘행위구원’이 자리잡고 있다. 행위구원은 역사적, 신학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와 펠라기우스(Pelagius, 354~420?)의 논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대의 기독교는 현대 개신교의 데자뷰를 보는 것처럼 극단적인 도덕적, 종교적 타락으로 가득차 있었다. 펠라기우스는 당대 기독교가 타락한 원인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과 ‘예정론’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구원에 있어서 은총의 역할을 무한대로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과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예정되어 있다는 ‘예정론’이 선을 행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살할 뿐 아니라, 도덕적 타락과 신앙적 해이(解弛)를 조장했다고 진단했다. 펠라기우스는 그 대안으로 ‘자유의지론’과‘행위구원론’을 주장했다. 흔히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로 불리는 그의 주장은 431년, 에베소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아우구스티누스주의와 펠라기우스주의의 통합을 시도한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 역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런데 중세 가톨릭교회가 사실상 펠라기우스주의 혹은 반펠라기우스주의에 경도된‘공로신학’ 혹은‘행위구원론’을 주장하자, 종교개혁자들은 일제히 역사적 정통으로 인정되는 아우구스티누스의‘은총론’과‘예정론’에 천착했다. 이후 아우구스티누스주의 혹은 역사적 정통주의가 지닌 약점이 역사적 현실로 구체화될 때마다‘알미니안주의’(Arminianism),‘웨슬레주의’(Wesleyanism) 등 그 대척점에 선 주장들이 등장했고 큰 호응을 얻었다.

역사적으로 고찰해 볼 때, 현대교회가 지닌 ‘믿음과 행함’의 딜레마는 그 근저에 ‘행위구원론’에 대한 트라우마가 자리잡고 있으며, 더 나아가 믿음과 은총을 강조하는‘정통주의’와 행함 및 자유의지를 강조하는‘비정통주의’의 역사적 대결이 그 실체임을 알 수 있다.

탈출구는 없는가?

현 개신교회의 상태를 조망해보면, 구원론에 관한 한 ‘아우구스티누스주의’가 확고한 대세로 자리잡은 가운데 그 대항마가 전무한 실정이다. 이것은 정통주의가 옳으냐, 비정통주의가 옳으냐는 양자택일론을 넘어서, 비정통주의의 등장이 역사적, 신학적으로 정통주의의 타락과 부패를 저지하고 기독교를 갱신하는 동력으로 기능해왔다는 점에서 건강한 비정통주의의 부재는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산업혁명 이후 극단적인 위기에 직면한 정통주의와 영국 사회를 구원한 웨슬레주의는 건강한 비정통주의의 대표적인 예이다. 중세 말 가톨릭교회는 타락한 비정통주의(토마스주의)의 대표적인 예로, 정통주의를 주창한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자체 갱신의 기회를 맞이했다. 나아가 건강한 정통주의의 등장은 부패한 비정통주의의 자성을 촉구했을 뿐 아니라 기독교 전체가 갱신과 개혁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우리는 단순히 신학적, 교리적으로 정통이냐 비정통이냐 하는 사변적이고 소모적인 논쟁을 지양하고, 새로운 시각에서 현대교회를 바라보아야 한다.‘믿음과 행함’에 대한 문제도 동일한 시각으로 재조명해 보아야 한다. 초대교회가 이러한 논쟁을 어떻게 극복하고 기독교의 생명력과 정체성을 수호할 수 있었는지 알아야 한다. 여기에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숨겨져 있다.

무엇이 다른가?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의 시각과 현대 기독교인들의 시각은 어떻게 다른가? 초대교회와 현대교회의 차이는 무엇인가? ‘믿음과 행함’이라는 관점에서 주요한 차이점 두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초대교회는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지 않았다. 초대교회는 믿음과 행함에 대한 신학적, 교리적, 이성적 분석에는 매우 취약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과 행함을 통합적이고 유기체적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그들은 믿으면 그 믿음대로 행했다. 그들은 믿음이 전 재산을 요구하고, 생명을 요구하고, 자아의 죽음을 요구하더라도 그대로 행했다. 초대교회에서 행함은 믿음 이후에 따르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조건이었다. 그들에게 믿음과 행함의 분리는 영적인 죽음을 뜻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서의 가르침이 살아 있었다.

둘째, 초대교회는 믿음과 행함을 단순하고 실제적인 영적 실재로 보았다. 그들은 믿음에 전 생애를 걸 만큼 실제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믿음을 통해 단순히 내세적인 천국이 아니라 이 땅에 실재하고 지금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천국을 보았고, 그 믿음의 프리즘을 통해 이 땅에서 그들의 행위가 혁명적으로 변했다. 믿음은 천국행 티켓이나, 구원의 확신으로 대체될 수 없는 살아 있는 실재,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였다. 그러나 현대교회는 믿음을 추상화하고, 교리화하고, 상품화함으로써 초대교회가 가졌던 믿음의 단순성과 실재성, 그리고 그 놀라운 영향력과 생명력을 상실했다.

이상의 차이점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좀 더 단순해져야 한다. 복잡하게 따지고 의심하고 지적인 만족과 감정적인 카타르시스에 머무는 종교 행위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돈 한 푼 쓰지 못하고 굶어 죽어가는 부자와 같다. 우리는 수많은 설교와 신앙 지식과 콘텐츠의 홍수 속에 정작 길을 잃고 방황하며 죽어가고 있다. 아무 것도 없지만 단순한 진리 하나를 붙들고 생명을 걸었던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이 누렸던 그 행복, 그 기쁨, 그 충만함, 그 복음의 힘을 우리는 잊어버렸다.
좀 더 내려 놓자, 좀 더 단순해지자, 좀 더 신앙의 실재에 다가가자. 그래야 예수의 품 안에 있는 진짜 천국, 진짜 생명, 진짜 행복에 다가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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