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고난 당할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마귀가 너희 중에서 몇 사람을 감옥에 던져 넣어 너희를 시험하리니 너희가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하리라. 너는 죽기까지 신실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성경에는 종종 난해한 구절들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독자나 성도들을 당황스럽게 만들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난해한 구절을 주신 심오한 의미가 있습니다. 궁금하면 더 깊이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하고 깊이 들어오라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0의 "열흘"에 대해 클라렌스 라킨은 "의심의 여지 없이 로마 황제 하에서 자행된 '열 차례의 큰 박해들'(Ten Great Persecutions)로, A.D. 64년의 네로와 함께 시작되어 A.D. 310년 디오클레시안과 함께 끝난다. 이 '큰 박해들' 가운데 일곱 박해가 교회사의 '서머나 기간' 중에 일어났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중 맨 마지막에 가장 맹렬했던, 디오클레시안 통치 하에 일어났던 10년 동안의 박해를 언급할 수도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음은 10이라는 숫자에 대한 성경적 해석들입니다.

“10은 세상의 만수로서 세상에서는 10을 한 주기의 끝으로 보며 제한된 완벽을 상징합니다.” 열흘 동안의 환난(2:10), 열 뿔(12:3, 13:1, 17:12, 17:16), 열 왕(17:12), 열 면류관(13:1) 등이 그 예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길고 혹독한 박해라고 해도 한정이 있고 그 다음에는 축복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숫자 10은 계시록과 같이 성스럽고 상징적인 예언서에 자주 등장할 뿐만 아니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자주 실생활에 쓰이는 숫자입니다. 성스러운 숫자인 3과 7의 합이며, 십계명처럼 결함이 없는 완성을 의미합니다. 또한 인간의 완전수입니다.” 성경에는 예언에 대한 시간 계산에서 1일을 1년으로 계산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민 14:34, 겔 4:6). 따라서 위의 열흘 동안이라는 시간은 10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요?

또 우리의 속담에는 “세도가 십 년을 못가고 (권불십년)”,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10년이 긴 기간을 의미할 수 있지만, 반드시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프랑스 혁명 후의 집권자들은 7일 단위의 삶의 주기를 강압적으로 10일 단위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무신론 사상으로 무장한 그들은 생활 주기를 바꾸어 하나님을 멀리하도록 유도하는 정책을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프랑스는 현재 무신론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0일로 삶의 주기를  변화시키려던 집권자들의 시도는 좌절되었습니다. 여전히 7일 주기의 삶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7일 단위로 살다가 10일 단위로 삶의 주기가 바뀌면 그 10일이 굉장히 길게 느껴질 것입니다. 따라서 위 성경 구절의 “열흘 동안”이라는 단어 역시 상대적으로 짧게 느껴질 수도 있고, 길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환난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경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통적으로 6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하루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쉬는 것입니다. 지금은 세계의 재물(상권)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유태인들의 뜻에 따라 5일 일하고 토요일(유태인들의 안식일)까지 쉬는 5/2 형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근본적으로 세상의 미움을 받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로 인해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며 너희를 대적하여 거짓으로 온갖 악한 것을 말할 때에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보상이 크니라. 그들이 너희 전에 있던 대언자들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

예를 들어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이 6일 동안에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7일에는 쉬셨다는 기사를 그대로 믿습니다. (물론 믿는 사람들 중에도 그 기사를 안 믿거나 선별해서 믿는 사람들이 있기는 합니다. ) 또 지구의 나이는 6,000년 정도로 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주의 나이도 젊은 지구의 나이와 마찬가지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 창조 기사를 믿어야만 예수님이 실제 인물이라는 것도, 죽은 후에 부활하셔서 구름 타고 승천하셨다는 기사도 그리고 재림하신다는 것과 우리도 죽은 후에 부활하여 영생한다는 성경 말씀도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은 이 창조 기사를 안 믿고 지구의 나이도 수억 년이라 주장하고 있고, 성경 말씀들이 허구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당연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미워하겠죠?

그리고 성경이 없으면 지금이 “말세”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더더욱 믿는 자들을 경원시하는 것입니다.

위의 성경 말씀 “열흘 동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하여 "야베스의 기도"라고 알려진 성경 구절을 인용합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며 이르되, 원하건대 주께서 참으로 내게 복을 주사 내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이 나와 함께하사 주께서 나를 악에서 지키시며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가 구하는 것을 그에게 주셨더라"(대상 4:10).

야베스의 기도라는 제목의 책이 많이 눈에 띕니다. 『야베스의 기도』, 『다시 쓰는 야베스의 기도』, 『야베스의 기도, 그 후』 『어린이를 위한 야베스의 기도』, 『야베스 기도의 숨겨진 진실』, 『야베스의 영성』 등 역대상 4:10에 나오는 야베스의 기도 한 구절을 가지고 이렇게 두꺼운 책들을 여러 권 쓸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또 많은 목사님들의 글에서 야베스의 축복에 대한 내용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한번 인터넷에 들어가서 찾아보시기를 권합니다.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역대상 4:10, 딱 한 구절인 야베스의 기도가 왜 그렇게 유명해지고, 사람들의 인기를 끌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서, 그 이면에 개인주의와 기복 신앙이 깔려 있는 게 아닌지 염려됩니다.

“주께서 야베스가 요구한 것을 들어 주신 것은 ‘주께서 그것을 주고자 하셨기 때문이지’, 반드시 그 기도 내용이 올바르고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야베스의 기도에 대하여 성경은 솔로몬의 기도에서처럼, ‘야베스가 이것을 구하매 주께서 그 말을 기쁘게 여기시니라’ 라는 표현을 사용하거나 긍정적 평가를 내린 적이 없습니다. “ 라는 어느 분의 의견을 따르고자 합니다.

너무 견강부회한 해석들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복과 연결시켜 해석하려는 고의적인 의도는 아닌지? 말씀 그대로 믿고 따르지 않고, 소위 영적인 해석을 추구하다가 엉뚱한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에도 이 “열흘 동안”을 해석할 수 있는 성경 구절이 있다고 봅니다.

"진실로 그들은 며칠 동안 자기들이 기뻐하는 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그분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시나니 이것은 우리가 자신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히 12 10).

"그러나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부르사 자신의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신 분께서 너희가 잠시 고난을 받은 뒤에 너희를 완전하게 하시고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고 정착시키시리니"(벧전 5: 10).

이 “열흘 동안”은 짧을 수도 있고 , 길 수도 있는 있는 기간이지만 숫자로 명기함으로써 환난에 처할, 또는 환난에 처한 우리들에게 환난을 견딜 수 있는 희망을 주는 숫자일 수도 있습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터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인내로 너희 혼을 소유하라"(눅 21:17-21:19).

"열흘만 참으면,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 하시는도다. 아멘.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계 22 :20).

이처럼 참는 자에게 영원한 복이 있을 것이라는 확증의 말씀인 것 같습니다.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필립 얀시)를 다시 읽고 있습니다. 고통이 몸 안에서 나올 때보다 외부에서 올 때 정말 내가 감내할 수 있을지를 심각하게 생각해 봅니다. 특히 믿음 때문에 육체적인 핍박을 받는다면 그것을 이겨낼 수 있을까? 자문해 봅니다. 솔직히 말해서 참으로 두렵습니다. 이는 두려우신 하나님을 모든 일에서 경외하는 훈련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속이 무척 상합니다. 지금부터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의 훈련을 하고자 합니다. 신체적인 고통은 그 효과가 대단합니다. 고통이 몸으로 하여금 다른 활동들을 중단하고 고통의 원인에 집중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글은 앨런 페이톤의 글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고난에서 해방되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결코 없었다. 우리 주님도 고난을 겪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가 우리를 고난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어떻게 고난을 견딜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고난당하셨다고 믿게 되었다. 고난이 없는 삶은 없다는 것을 그는 아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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