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의 시대는 지나갔다. ‘파이가 크면 나눌 것도 많다’는 성장주의의 환상을 단 일격에 깬 책으로는 미국인 정치학자이자 평화운동가인 더글라스 러미스가 쓴 소책자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만한 것이 없다. 그는 책 제목에서 이미 충분히 보여 준 바와 같이 ‘경제성장이 된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풍요롭지 못하다’는 주제를 붙잡고, 마치 눈앞에 빙산이 있음에도 ‘전속력으로!’를 외치고 있는 21세기 타이타닉 호에 올라탄 비상식적인 현실주의자들에게 성장주의의 결과는 결국 우리가 사는 지구를 ’방사능으로 오염된 유토피아’로 만들었다고 개탄하며, 이제는 풍요의 질을 바꿔야 한다고 항변한다.

소위 경제보다는 영혼을 소중히 하는, 세상과는 거꾸로 가야 하는 우리의 기독교는 성장과는 무관한가? 19세기 영국에서 가장 경건하다 싶은 청교도 설교자 찰스 스펄전의 한 세기 전의 예언은 섬찟할 정도로 정곡을 찌른다. “오늘날의 부흥(성장)이 축복이 아닌 저주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 때가 종종 있다. 왜냐하면 현대적 부흥(성장)은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처한 비극을 깨닫기 전에, 평안을 먼저 맛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후 지난 100년간 세상은 여전히 성장일변도에서 빠져 나오질 못했고, 세상의 발전 속도를 따라잡느라 헉헉대던 교회의 딱딱한 마루바닥은 붉은 색 카페트와 방석 달린 안락의자로 바뀌었고, 가장 경건해야 할 예배는 A.W. 토저가 경고한 대로, 내용 없는 ‘쇼’가 되었으며, 말씀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시작하는, 성장주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비현실적인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슬그머니 뒷전에 물리고, 대신 디트리히 본 회퍼가 무덤에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값싼 은혜’를 남발하고, 선교는 남아프리카의 선교학자 데이빗 보쉬가 경고했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하나님의 선교가 아닌, 현지 중심의 선교가 아닌 파송교회 중심의 물질 위주 선교가 되었고, 소위 한국 목회자들이 가장 선호한다는 미국의 풀러신학교에는 예수님도 못 가르친 ‘교회성장학’까지 가르치게 되었으며, 건물로서의 교회는 미국 텍사스의 영웅 목사 조엘 오스틴이 ‘봐라, 내가 해냈다’식으로 여실히 증명해낸 것처럼, 미국 풋볼구장을 구입해 한 번에 1만 6천 명의 군중이 마치 풋볼 관람하듯 열광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메가사이즈 교회로 둔갑했다.

미국의 성장을 그대로 본받고 있는 한국의 기독교 역시 이에 뒤질세라, 국내에서는 영리기업에서 해외지사 설립하듯, 공통된 비전과 균질(?)의 목회자 양성을 통해 전 세계에 수백 개의 지교회를 세우겠다는 야심차나 반문화적인 구상을 실행에 옮긴 초대형 교회도 있고, ‘내 돈 가지고 내가 쓴다는데 네가 웬 참견이야’식으로, 그것도 온 국민이 경제 악화로 고통 받는 시기에 건축을 강행해, 그래서 교인들이 서로 반목하게 되고 갈라지게 되는, 결국에는 온 한국인의 빈축을 사게 된 대한민국 제1호 초호화교회도 있다. 어디 이뿐인가? ‘모였다 하면 잠실 종합운동장 정도는 돼야’ 한다고 믿는 성장주의의 수혜 교회나 목회자들은 소위 평화기도회를 한다는 명목으로 온 동네 교인들을 다 불러모아 세를 과시하기도 한다. 그래서 최근 한국의 미래학자라는 최윤식 목사가 쓴 『2020-2040 한국교회미래지도』란 책에서 예언(?)했듯이, 한국 교회는 이대로 가면 10년 후 400만 명 안팎으로 줄어든다는 것 아닌가? 그러니 한국교회의 잔치는 끝났다는 것이다. 잘 나가는 성장은 지나갔다는 것이다.

다시 더글라스 러미스의 결론으로 돌아가보자. 그는 한 자리 두 자리 경제성장이 아니라 되려 제로 성장을 제안했다. 파이를 더 키우기보다, 있는 파이를 잘 관리하자는 것이다. 파이를 키운다고 분배가 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 이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경죄에 속할 것이다. 성장하지 말자는 것과 다름없으니… 그의 말은, 다시 말해 양적 성장이 아니라 질적 성숙이 중요하다는 것과 다름 없다. 신앙적으로 해석해도 다르지 않다. 이미 우리는 충분히 축복받았다. 이제는 60년대식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아니라, 길가로 나가 ‘불신지옥’을 마구 외쳐대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앉아 ‘우리에게 왜 성장이 필요한가?’를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흥이 아니라 각성이다. 같은 맥락으로 ‘내 교회, 한국교회가 성장한 결과가 뭔지 구체적으로 고민해 봐야 한다.’ 그리고 더글라스 러미스의 책 제목처럼, ‘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우리의 영혼이)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해야 한다. 그러면 아마 교회 안밖에 지난 수십 년간 줄기차게 걸려있는 ‘---부흥,--- 성장’이란 현수막부터 끌어내리게 될거다. 그리고 신자로서의 참된 성숙의 의미를 곱씹게 될 거다.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성장이 아니라 성숙이야!’

21세기 가장 존경 받는 영성학자 중 한 명인 퀘이커 교도 리차드 포스터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그의 책 『영적 성장과 훈련』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지긋지긋하게 봐왔던 피상적인 성장은 우리 시대의 저주라고 했다. 그는 이어서, “복음주의 기독교는 대개 그 깊이가 얕다. 그것은 어중간한 지성과 생각 없는 감성주의를 양산해왔다. 크리스천들은 교육받았고, 적극적이 됐다. 많은 이들이 넘치도록 행복하다. 하지만 그들은 그다지 깊지 못하다.”고 성토한다.

외형 중심의 성장의 그 끝을 우리는 매일 본다. 없는 형편에 건축 헌금을 내야 하느니, 그렇다면 얼마를 해야 하느니 하는 가족간의 불편한 대화에서, 여전히 부흥과 성장의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설교자의 지치지 않는 강변을 통해서, 처절하게도 3류 영화의 카메오로 등장하는 이미 동네 북이 되어버린 교회의 천박한 모습에서, 소위 가나안(안나가) 성도라 불리는, 지긋지긋한 교회를 떠나 자신만의 교회를 찾아 하염없이 헤매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통해서, 신앙은 기도와 행동이 같이 가야 하는 것임에도 여전히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귀만 쫑긋 세우도록 훈련되는 수많은 소위 통독사경회와 들어도 섬찟한, ‘성경완전꿰뚫기’ 일주일 합숙훈련을 통해서...

그래서 캐나다 밴쿠버 리젠트 칼리지의 폴 스티븐스 교수가 이 세상에 그의 존재를 알린 책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들의 믿음은 얕고, 훈련되어 있지 않고, 결국 스스로 분별할 수 없게 됐다. 1세기 사도바울이 사랑 가운데서 진리대로 살면서 여러 면에서 자라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도록 우리를 권면했는데, 우리는 여전히 인간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어린아이와 같은 수준의 신앙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엡 4:13-5) 우리들의 몸은 비대해졌지만 영혼은 여전히, 역시 사도바울이 말한 대로, 단단한 음식은 먹을 수 없고 젖만 빨아대는, 그리고 온갖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린아이 수준에서 성장이 멈췄다(고전 3:1-3).

이제는 성장이 아니라 성숙을 논할 때다. 어린 아이의 신앙에서, “내가 어릴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고전 13:11)라고 고백하는 사도바울과 같이 우리도 어른으로 자라나야 한다. 헨리 나우엔이 『영적 발돋움』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아를 향해, 이웃을 향해,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계속 뻗어나가야 한다.(계속)

* 편집자 주 : 박준형 필자는 캐나다 밴쿠버에 사는 이문화 컨설턴트 겸 저자이며, 미국 인디애나 주의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신학교(AMBS)와 밴쿠버 리젠트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저서로 『볼프강의 글로벌 비즈니스 에티켓 1,2편, 김영사, 2000』『변화의 파도를 타라 1,2: SFC, 2004』,『내 아이 창의력을 키우는 영어 글쓰기, 웅진출판사, 2008』, 『크로스컬처 : 바이북스, 201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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