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행함(5)

말씀의 종교

흔히 기독교를 ‘말씀의 종교’라고 부른다. 특히 개신교를 지칭할 때 자주 사용되는 이 말은 개신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명칭에서 언급된 ‘말씀’은 직접적으로 기록된 성경을 가리킨다. 그래서 개신교회의 예배는 성경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설교’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나아가 성경읽기, 성경공부 등 성경은 신앙생활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즉, 개신교에서 신앙생활은 항상 성경, 설교, 말씀 등 ‘말’을 중심축으로 회전하며, 이 ‘말(복음)’을 전하는 것을 전도 혹은 선교라고 한다. 가히 기독교는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나는 종교라고 할 만하다.

말쟁이 양산소(?)

현대 기독교가 기록된 ‘말씀’에 근거하여 역사적 정통신앙을 회복한 종교개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말씀’이 교회와 신앙의 중심이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기독교의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펼쳐질 수 있다. 비기독교인들의 눈에 비친 현대교회의 모습은 ‘말쟁이 양산소’ 혹은 ‘말쟁이들의 집단’ 등으로 요약된다. 종교개혁자들이 생명을 걸었던 ‘진리의 말씀’이 종교적인 위선자들의 ‘거짓’ 혹은 ‘말장난’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거룩한 공동체가 아니라 자신과 가족 및 집단의 이익을 위해 진리를 왜곡하고 남용하는 타락한 집단으로 낙인찍혔다. 기독교인들은 말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는 대표적인 종교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진리가 거짓으로 전락하다

왜 거룩한 진리의 말씀이 ‘거짓’, ‘말장난’, ‘위선’으로 전락하고 말았을까?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고 세상과 사람을 다스리고 운행하는 절대적인 능력이 있는데, 기독교인들의 말은 아무 힘이 없는 말장난이나 거짓으로 치부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근본적인 원인은 ‘말씀’에 대한 왜곡된 이해 혹은 강조에 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즉 기독교의 신앙의 대상이 되는 예수가 바로 ‘말씀 자체’라고 선포하고 있다. 기록된 말씀은 말씀 자체이신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다. 기록된 말씀이 증거하는 예수는 역사적으로 실재하셨고 지금도 살아계신 인격이신 하나님이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고, 예수 안에 진리가 있고, 예수 안에 구원이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따라서 기독교와 교회의 진정한 중심은 ‘살아계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마땅하다.

현대 기독교는 이 진리를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이 원리를 교회와 신앙생활에서 온전히 구현하는 데 철저하게 실패했다. 교회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실제적으로 구현하고 실천하는 지상의 천국이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좇아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이다. 교회는 갈등과 분열과 비리의 온상이고, 그리스도인들은 편협하고 이기적이고 탐욕에 물든 위선적 종교인이다.

언행(言行)불일치의 극복

기독교의 주장과 기독교의 실상이 극단적으로 배치되는 현실은 단순히 언행(言行)불일치라는 말로 치부할 수 없는 근원적인 문제이다. 기독교의 존폐가 걸린 문제라는 점에서 반드시 그 대책을 모색해야 한다. 그 해결책은 ‘말씀’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바로잡는 데서 출발해야 하고, ‘말씀’이 증거하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이 땅에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구현하는 것이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 이 과제는 기독교 신앙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주제이므로, 이 글의 주제와 연관된 ‘믿음과 행함’이라는 관점에서 제한적으로 그 해법을 살펴보자.

언행불일치와 관련해서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기독교 내에서 말을 지나치게 피상적으로 다루고 가볍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말의 중요성, 능력, 힘에 대해서 우리는 대단히 무지하다. 우리는 말을 지식으로 격하시켜서 이해하고 있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말은 단순한 지식, 혹은 지식의 표현이 아니다. 말이 가리키는 것은 진리요 생명이다. 말에는 창조할 수 능력, 혹은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이 내재되어 있다.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경험하는 사실은 사람들이 말 한 마디에 울고 웃는다는 것이다. 말 한 마디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 현대인의 상식이 된 이 진리가 정작 기독교 내에서는 간과되고 있다. 그러므로 언행불일치를 극복하는 첫걸음은 바로 ‘말의 중요성과 능력, 그리고 힘’을 인정하고 회복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무심코 내뱉는 한 마디가 타인의 영혼에 심각한 상처를 주고, 나아가 관계와 삶을 파괴할 수 있는 무서운 칼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믿음과 행함을 다룬 최고의 성경 야고보서는 메시지 중심(3장) 전체를 ‘말(혀)’의 힘과 기능, 그리고 위험성에 대한 설명에 할애하고 있다.

언행불일치 극복을 위해 우리가 재인식해야 할 또다른 사실은 ‘말은 마음의 중심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우리가 내뱉는 말들은 모두 마음 속 깊은 곳에 쌓여 있던 것이 적당한 환경과 처지에서 의식적, 무의식적인 사고를 거쳐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믿음은 바로 마음에 좌소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행하는 언어생활을 분석하면, 막연하게 생각하는 믿음의 정확한 실체가 드러난다. 한 사람의 믿음은 그가 사용하는 말의 총합으로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 말을 통해 우리는 그 사람의 믿음과 마음의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과 마음과 말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믿음과 마음은 그 실체가 모호하고 얼마든지 가장할 수 있지만, 내뱉은 말은 마음 속의 생각과는 달리 그 실체가 분명하다. 스스로 속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지름길은 자신의 언어생활을 차분하게 들어다 보는 것이다. 일상적,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말을 통해 자신의 실체를 파악하고, 신앙을 점검하는 것은 절름발이 같은 신앙의 장애를 극복하는 토대가 된다.

정직한 혀, 정직한 말을 위한 투쟁

자신의 일상적인 언어생활을 정직하게 들여다보고 자신의 신앙의 실체를 파악할 뿐 아니라, 실체화된 믿음 즉 내뱉은 말의 총합과 삶의 간극을 주기적으로 점검하는 것은 고착화되고 경직되어 종교적 위선으로 변질되는 신앙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그러나 말을 통해 믿음과 삶을 돌아보는 작업이 반드시 신행(信行)불일치와 언행(言行)불일치의 극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말을 통제하고 혀를 길들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다른 보혜사 성령이 도우시면 가능해진다. 언어생활의 재점검을 통해 신앙의 실체와 삶의 실상을 확인할 때 우리는 정직하게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와 은총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부패하고 훼손된 내면의 실상을 부인하지 않고 주님의 긍휼과 은총을 간구할 때 성령의 새롭게 하는 역사, 회복과 승리와 변화의 역사가 시작된다. 말쟁이들의 집단이 거룩한 사랑의 공동체로 변하는 것은 정직한 혀, 정직한 말을 위한 부단한 투쟁에서 시작된다. 혀를 통제하는 자가 진정한 신앙인, 진정한 승리자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시작하는 때에 우리의 신앙과 삶을 새롭게 할 정직한 말을 위한 투쟁을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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