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갑자기 불이 난다면 무엇부터 챙겨가지고 탈출할까.

쌀가마니부터 먼저 지고 나와야 한다는 부모들이 있었다. 보리고개의 굶주림이 지긋지긋하던 시절이었다. 강아지 같은 애완동물을 제일 먼저 들고 나오는 아이들도 있다. 물론 지금도 돈 가방이나 보석함을 먼저 챙기는 사람들이 어찌 없으랴. 평양에서는 김일성 사진부터 끌어안고 나왔다는 사람이 ‘인민 영웅’의 호칭을 받았단다.

그러나 사람을 제일 먼저 구출해야 한다. 쌀가마니 들고 나오다가 잠자는 아이들이 불에 타죽어서야 되겠는가. 돈 가방이나 보석함 먼저 챙기다가 늙으신 부모님을 시체로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사람 나고 돈 났지 어디 돈 나고 사람 났던가.

철학의 가치론은 바로 이런 문제들을 연구한다. 사람에게 있어서 절대 가치 혹은 최고의 가치는 무엇일까. 그리고 왜 그런 것이 가치 있는 것일까. 육체와 정신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일까, 국가와 개인, 자유와 평등은 어느 것이 더 우선적일까.

학교의 교훈이나 급훈을 보면 ‘쓸모 있는 어린이가 되자’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좋은 교훈이요 값진 급훈이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따져보면 그것에도 의문이 간다. 사람의 가치가 ‘쓸모’ 곧 효용성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생명 그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일까. 과거에 독재국가나 공산사회주의 정부에서는 장애자들을 이등인간 혹은 소모적 인간으로 취급했다. 쓸모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국가나 사회에 손해를 끼치는 존재였다. 그래서 쓰레기처럼 처치해 버린 국가들도 있었다.

성경은 이런 점에서도 가장 위대한 책이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사랑하기 위하여 존재하고,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돕기 위하여 존재한다고 가르친다(마 23:11). 사람의 생명은 그가 무엇을 가졌느냐 혹은 얼마나 쓸모 있느냐로 그 값이 매겨져서는 안 된다. 생명 그 자체를 천하보다도 귀중하게 대우해야 한다.

불이 났을 때 김일성 사진 먼저 들고 나왔다는 북조선 사람들은 그만큼 김일성을 신격화하고 있다. 그렇기에 비록 자식은 불태워 죽이더라도 김일성 사진만은 가슴에 꼭 품고 나온 것 아닌가. 그런 사람은 북조선에서는 정말 위대한 인민영웅 칭호를 받을 만도 하다.

그런데 김일성이 그 사실을 보고 받고 무어라 했을까? 정말 잘했다고 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그는 독재자 중의 독재자라는 걸 스스로 인정한 꼴이 된다.

“뭐라고? 내 사진 들고 나오느라고 자식을 불태워 죽였다고?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또 어디 있겠나. 자식의 생명이 내 사진보다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을 어찌 몰랐단 말이냐.”

그랬다면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이 되었을 것 아닌가.

그래서 하는 말이다. 불이 나더라도 예수님 초상화 꺼내올 생각은 전혀 하지 말아야 한다. 믿음이 불타는 신자라면 당연히 사람의 생명부터 구출해야 한다. 초상화가 불타면 다시 그리든지 혹은 복사하면 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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