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으로 성숙해진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그 중요성에 대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같은 초대교회 교부들로부터 시작해, 이집트의 사막에서 땅을 파고 수도한 안토니우스와 같은 사막의 교부들, 그리고 경건과 침묵과 노동을 강조하는 베네딕토회의 수도승들 그리고 중세의 아빌라의 테레사와 십자가의 요한과 이냐시오, 근대의 감리교 창시자인 영국의 요한 웨슬리와 미국의 대각성운동의 리더 중의 한명인 조나단 에드워즈, 그리고 21세기의 헨리 나우엔과 유진 피터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영성가들이 강조해 왔지만, 여전히 이들의 소리는 60년대, 70년대 성장주의의 수혜자로 자라난 우리들에게는 새벽부터 일어나 하루 다섯 번씩 꼬박꼬박 기도문을 외워야 하는 베네딕트 수도원의 그레고리안 챈트같이 따라 부르기도 힘들고, 영화 <위대한 침묵>에서 소개된, 마치 1688년 해발 1,300m의 알프스 산중에 세워진 이래 한 번도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던 카르투지오 수도원의 기나긴 침묵처럼 이해하기도 힘들다. 그뿐인가? 영적 성숙으로 가는 길이란 마치 카파도치아의 벼랑 끝이나 수백 미터 위 나무 꼭대기나 그것도 부족해 바위를 깨고 들어가(깨고 들어가는 데만 해도 수년이 걸렸을 것이다) 평생을 수도했던 동방교회 전통의 은수자들처럼 감히 범접하기도 힘들 정도다.

영적으로 성숙하다는 것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기준은 없는 것인가? 영적 성숙은 꼭 중세의 아빌라의 테레사를 비롯해 현대의 마더 테레사 그리고 토마스 머튼에 이르기까지 이구동성으로 강조한, 하나님과의 일체를 이루게 되는 이런 신비주의적인 경험의 영역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아무리 고상하고 고매한 영적 성숙자라도 우리가 사는 지구에서 한 번만 발을 잘못 떼면 우주의 방랑자가 되는 것처럼, 영적인 성숙도 현실에 근간을 두고 있지 않으면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우리는 영적으로 성숙해져야 합니다’로 끝나는 설교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들어왔는가? 그래서 얼마나 성숙해졌는가? 우리에게는 왜, 어떻게 구체적으로 성숙해져야 하는지를 가르쳐 줄 스승조차 없단 말인가? 유진 피터슨의 책 제목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고 단상에서의 추상적인 설교나 말씀에 지친 자들이 애타게 찾는 것은,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일 거고 ‘현실에 뿌리박은 성숙’일 거다.

영적 성숙의 현실적인 표징은 분별력에 있다. 분별은 『영적 분별의 길』을 쓴 엘리자베스 리버트 수녀의 말대로, ‘일상 속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의 영을 따르려는 갈망’이니 말이다. 『분별력: 포장에 현혹되지 않는 믿음』을 쓴 복음주의 전통의 목회자이자 저자인 존 맥아더 역시 “영적 성숙은 분별력을 배우는 과정”이라고 말하면서, 히브리서 5:14의 말씀에 근거해 “성숙해지면서 우리의 의식도 선악을 분별할 수 있게 훈련될 것이다”라고 했다. 많은 크리스천 저자들이 일반적인 분별력과 분별해, 영적 분별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먹고 배설하는 기본적인 생리 활동 외에는 모든 것이 다 영적이라고 믿는, 그리고 가톨릭의 영속의 구분을 만인은 제사장이라는 ‘거룩한’ 이름으로 철폐해 준 루터에게 감사해서라도 나는 그냥 분별력이라고 통칭하고 싶다. 분별이 하늘 위에서 다르고 하늘 아래서 다를 수 없으니 말이다.

그 사람의 분별력이 그 사람의 영적 성숙도를 말해 준다. 하루에 몇 시간을 기도하는지 알 수 없고, 얼마나 고독을 사랑하는지 알 수 없고, 얼마나 말씀대로 사는지 알 수 없고, 주님과의 합일을 통해 어느 수준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일상에서의 판단과 결정과 분별을 통해서 어떤 결과나 열매를 가져오는지는 쉽게 판별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분별이나 결정은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잘했는지 못했는지 판별이 가능하다. 그의 삶, 그것이 진정 진리대로 살아냈는지는 그가 내린 결정과 실천과 그 결과로 알 수 있다.

성인인지 저속한 신도인지 알고 싶은가? 그 사람의 분별력을 보면 된다. 소위 성인이라 불리는 자들은 분별력이 좋다(아니, 좋아야 한다). 이들은 함부로 거짓 맹세를 하는 경우가 없을 거며(베드로의 경우,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는 더 이상 이런 일은 없었다), 그분을 21세기의 자본주의 시장으로 모시고 온다 해도, 수입을 초과한 지출은 추호도 하지 않을 거며, 저급한 상업주의에 속아 충동구매도 안할 거며(‘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가 말뿐이 아니라면), 지나가는 사람이 자극적인 말로 놀려댄다고 면상을 후벼 파지도 않을 거며(도리어 다른 쪽 뺨을 갖다 대기는 해도), 저 사람의 신조가 나와 다르다고 저주를 퍼붓지도 않을 거며(이웃을 사랑하는 게 이런 것은 아닐진대), 이웃 사촌이 집을 샀다고 배 아파 하지도 않을 거며(도리어 축복을 해줄 거며), 자기 자식 좋은 대학 보내달라고 들들 볶지도 않을 거며(도리어 공중의 나는 새도 먹이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감사의 눈물을 흘릴지언정), 교인 들들 볶아 교회 건축에 목숨 거는, 그리고는 한 해도 못 넘겨 빚 더미에 앉을 일도 하지 않을 거며, 교회는 정치에 상관하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대통령조찬기도회에 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며(그렇다면 예수님은 정치적이 아니란 말인가? 하나님의 통치의 그 통치는 정치적인 용어가 아니란 말인가? 존 하워드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을 보면 답이 있다!),

예수님의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를 가르치면서, 이 세상의 평화하고는 담 쌓고 사는 짓을 하지 않을 거며, 매일 아침 저녁으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를 기도하면서, 일용하고도 넘칠 일들만 골라 무리하게 추진하지는 않을 거며, 소위 제자양육 코스란 코스를 다 섭렵했는데도(도대체 무엇을 배웠는지?) 삶의 현장에서는 분별할 줄 몰라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을 거다. 결론은 기독교가 어두운 세상을 향해 거룩한 빛을 발해야 할 때 그 빛을 발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거룩한 갈증, 주님을 향한 갈증’을 불러일으킬 소금이 되어야 할 때 그 소금기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이래서 나의 관심사는 분별력에 있다. 그것도 현실에 뿌리박은 상식적인 분별. 다시 엘리자베스 리버트의 말을 빌려 보충하면, ‘일상 속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의 영을 따르려는 갈망과 그의 표출되는 행동으로서의 분별.’ 이게 뭔지 궁금한가? 그렇다면 이제부터, 사도 바울이 히브리서 5:14에서 권면한 대로 단단한 음식을 먹게 될 것이다. 그리고 훈련을 받아 좋고 나쁜 것을 분간하는 세련된 지각에 대해서 배우게 될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21-2의 말씀같이, 모든 것을 분간하고 좋은 것을 굳게 잡으며 갖가지 모양의 악을 멀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11-2의 말씀과 같이,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우리의 수준이 그렇지만은,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이다. 지금은 내가(우리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우리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우리가)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오묘하고, 하지만 실질적인 분별의 세계로 여러분들을 초대한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야고보서 1:2-4).

 * 편집자 주 : 박준형 님은 캐나다, 밴쿠버에 사는 이문화 컨설턴트 겸 저자이며, 미국 인디애나 주의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신학교와 밴쿠버 리젠트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저서로 『볼프강의 글로벌 비즈니스 에티켓 1,2』, 『변화의 파도를 타라 1, 2』,『내 아이 창의력을 키우는 영어 글쓰기』, 『크로스컬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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