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지음 / 문학동네 펴냄

 
지난 가을, 수필가이자 소설가인 김훈의 산문집이 출간되었다. 절판된 산문집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밥벌이의 지겨움』, 『바다의 기별』에서 일부를 취하고 새 글을 합쳐서 엮었다는 게 저자의 간결한 설명이다. 큰 제목 ‘밥, 돈, 몸, 길, 글’에 53편의 수필이 들어 있다. 가족 이야기부터 기자 시절에 기록한 글, 최근 섬에 들어가서 쓴 글 등 저자의 어제와 오늘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라 한다.

무료한 시간이나 때워 보자고 책장을 넘겼다간 두 줄도 넘어가기 전에 죄송스런 마음이 든다. 한 문장 한 문장 사색과 표현에 들인 공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마음의 자세를 바로잡게 된다. 저자가 컴퓨터 아닌 연필을 고집해서일까? 저자는 예전에 글쓰기를 음풍농월하면서 시대의 현실을 담고 싶다 했다는데, 놀이보다는 진지하고 경건한 노동으로 다가온다. 어느 문학평론가는 저자를 몇 안 되는 현대의 문장가라고 평했다.

김훈(1948~ )은 가자 생활을 거쳐 2004년부터 전업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1986년, 한국일보 재직 당시 3년간 신문에 연재한 글을 묶어 출간한『문학기행』은 해박한 문학 지식과 유려한 문체가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독서 산문집『내가 읽은 책과 세상』(1989), 『자전거여행』(2000)도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001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칼의 노래』는 그의 대표적인 소설이다. 이외에 『선택과 옹호』, 『풍경과 상처』, 『원형의 섬 진도』, 『‘너는 어느쪽이냐’고 묻는 말에 대하여』,『밥벌이의 지겨움』, 장편소설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 등이 있다.

-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들을 향하여 나는 오랫동안 중언부언하였다. 나는 쓸 수 없는 것들을 쓸 수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헛된 것들을 지껄였다. 간절해서 쓴 것들도 모두 시간에 쓸려서 바래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늘 말 밖에 있었다. 지극한 말은, 말의 굴레를 벗어난 곳에서 태어나는 것이리라. 이제, 함부로 내보낸 말과 글을 뉘우치는 일을 여생의 과업으로 삼되, 뉘우쳐도 돌이킬 수는 없으니 슬프고 누추하다. 나는 사물과 직접 마주 대하려 한다. 2015년 여름은 화탕지옥 속의 아비규환이었다. 덥고 또 더워서 나는 나무그늘에서 겨우 견디었다. 그 여름이 가고, 가을이 또 와서 숙살(肅殺)의 서늘함이 칼처럼 무섭다. 낮고 순한 말로 이 세상에 말을 걸고 싶은 소망으로 몇 편의 글을 겨우 추려서 이 책을 엮는데, 또 하나의 장애물을 만드는 것이 아닌지를 나는 걱정한다. (작가의 말)

-나는 오랜 세월 동안 라면을 먹어왔다. 거리에서 싸고 간단히, 혼자서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음식이다. 그 맛들은 내 정서의 밑바닥에 인 박혀 있다. 모르는 사람과 마주앉아서 김밥으로 점심을 먹는 일은 쓸쓸하다. 쓸쓸해하는 나의 존재가 내 앞에서 라면을 먹는 사내를 쓸쓸하게 해주었을 일을 생각하면 더욱 쓸쓸하다. 쓸쓸한 것이 김밥과 함께 목구멍을 넘어간다. 이 궁상맞음을 비웃어서는 안 된다. 당신들도 다 마찬가지다. 한 달 벌어 한 달 살아가는 사람이 거리에서 돈을 주고 사먹을 수 있는 음식은 뻔하다. 라면이나 짜장면은 장복을 하게 되면 인이 박인다. 그 안쓰러운 것들을 한동안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지 않아도 공연히 먹고 싶어진다. 인은 혓바닥이 아니라 정서 위에 찍힌 문양과도 같다. 세상은 짜장면처럼 어둡고 퀴퀴하거나, 라면처럼 부박浮薄하리라는 체념의 편안함이 마음의 깊은 곳을 쓰다듬는다. 이래저래 인은 골수염처럼 뼛속에 사무친다. (‘라면을 끓이며’ 중에서)

-나는 손의 힘으로 살아야 할 터인데, 손은 자꾸만 남의 손을 잡으려 한다.(손1 중에서)

-연어들은 자신의 몸과 자신의 몸을 준 몸을 서로 마주보지 못한다. 이 끝없는 생명의 반복인 무명과 보시는 인연이고, 그 인연은 세상의 찬란한 허상이라고 고형렬은 썼다.

-삶을 살아내는 자들은 삶을 설명하거나 추상화하지 않는다.

-미륵은 언제나 마을에 있었다.

-개별적인 목숨이 종족의 영원성 속으로 소멸하는데, 이 소멸 안에서 삶과 죽음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어 본래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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