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히 부패한 마음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선언한다. 한 사람의 예외없이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죄인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본성이 철저히 부패해 죄와 악을 추구하며, 선을 추구하지도 않고 선을 행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 타락한 본성의 중심은 바로 마음이다. 비뚤어진 마음, 상처입은 마음, 흉포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 마음이 치유되기 전에는 그 어떤 교화과정도 무의미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는 바로 마음의 부패와 타락을 인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참 그리스도인은 진리의 빛 가운데 드러나는 마음의 부패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날마다 새롭게 되기를 갈망한다. 나아가 부패한 마음과의 기나긴 전쟁에 필사의 각오로 임한다. 수많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한 걸음씩 전진하고자 분투한다. 주님의 도우심으로만 승리할 수 있음을 알기에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한다. 마음의 죄악과 부패를 확인할 때마다 늘 통회하고 자복하며, 진실하고 정직한 태도를 견지한다.

대단히 불행하게도 오늘날 심히 부패한 마음과의 치열한 전투에 매진하는 진짜배기 그리스도인을 찾기가 힘들다. 오랜 신앙경력을 자랑하는 그리스도인일수록 타성에 젖은 종교생활의 노예로 전락한다. 외형적 종교생활에는 열심이지만, 정작 자신의 삶에서 드러나는 수많은 죄악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부패한 마음을 말씀과 기도로 정화하려는 시도는 도외시한다. 이즈음에 이르면 사람들은 대개 두가지 선택을 마주한다. 적당히 교회생활,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음껏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 데 몰두하는 방종의 길이 그 첫째다. 첫번째 길을 택하는 것이 거리끼는 사람들(대개 교회의 중직자와 목회자)은 외형적인 신앙생활은 철두철미하게 하지만, 종교적 열심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근원적인 마음의 문제, 죄악의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한 합리화를 시도한다. 단순한 합리화를 넘어 나름의 조직적인 신앙(신학)체계를 마련하고, 이에 근거하여 자기의(義)를 내세우고, 자신의 죄는 가리고 타인을 정죄하기에 바쁘다. 방종파와 바리새파가 득세하는 현대교회의 타락을 극복하려면, 부패한 마음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말(言)과 생각

인간의 마음은 그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우리의 마음을 정확하게 아신다. 그러나 마음이 생각이라는 통로를 통해 그 실체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날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추적한다면 그 실체의 윤곽을 그릴 수 있다.

구체적으로 파악한 생각의 실체를 놓고 진지하게 기도하고, 성경에 비추어 평가해 보라. 탐욕, 거짓, 욕망, 음란, 쾌락, 위선, 이기심, 증오, 분노, 시기, 질투, 교만, 열등감 등, 수많은 죄악으로 가득찬 마음의 실체가 드러날 것이다. 정직하게 인정하고, 철저하게 회개하자. 회개의 열매가 맺힐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죄악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수없이 스쳐가는 생각들 중에 근간이 되는 것들이 말(言)이라는 형태로 공식화된다. 생각과 말의 차이점은 생각이 내면의 문제라면, 말은 이미 공식화되어서 외부세계와 자신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분노를 말로 타인에게 표출하면, 이미 살인죄를 범한 결과가 된다. 표출된 말은 타인에게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올무가 된다. 거친 말, 분노와 증오의 말, 불평의 말, 거짓과 위선의 말에 사로잡혀 불행하게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의 올무가 지닌 위력을 증명한다. 사랑의 말, 온유한 말, 위로의 말, 긍정의 말, 진리의 말, 포용의 말, 용서의 말, 찬양의 말, 덕을 세우는 말이 언어생활의 대세가 되도록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

선행(善行) -정직한 마음에서 나온 정직한 행함

선행에 대한 보편적인 오해가 있다. ‘선행은 착한 일을 행하는 것’이라는 오해다. 남을 돕고, 구제하고, 봉사하고, 기부하고 등등. 이런 의미의 선행은 비기독교인들도 활발히 실천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선행은 전혀 다르다. 선행에 대한 성경의 대전제는 ‘사람은 선행을 행하지도 않고 행할 수도 없다’(롬 3:10-15)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선행이 무엇인지부터 명확히 해야 한다. 선행은 ‘의인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의(義)를 따라서 하나님의 방법과 태도와 마음으로 겸손히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선행은 이웃사랑으로 외형을 포장하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내면의 알맹이가 빠져 있다. 철저하게 자신의 내면(마음과 생각)을 들여다보고 회개하지도 않고, 자신의 행위를 과장하고 자랑하고 포장하기에 바쁘다. 성경이 말하는 선행의 핵심은 철저한 회개에 근거한 정직한 마음과 정직한 생각, 그리고 정직한 말과 겸손한 자세에 있다. 정직한 마음, 정직한 생각, 정직한 말이 결여된 선행은 선행이 아니라 위선이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3)는 주님의 명령대로 선행을 자랑하지도 드러내지도 말아야 한다. 따라서 무익한 종의 자세가 결여된 선행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불경죄이다. 이것은 인간이 실천할 수 없는 이상론으로 들린다. 그렇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성경이 말하는 선행을 실천할 수 없다. 겉모양만 흉내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 온전히 성령의 도우심으로 행할 수 있다. 선행은 내가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것이다. 그래서 나를 도구로 사용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전부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

심(心), 언(言), 행(行) 일치 - 정직한 마음, 정직한 영을 주소서

선행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 말, 그리고 행위가 하나님의 뜻과 의(義)와 방법과 시기와 태도와 온전히 일치할 때 완성된다. 이것은 나는 죽고 오직 내 안에 예수가 사셔서 왕이 되셔야만 가능하다(갈2:20). 심언행(心言行) 일치를 통해 우리의 삶에서 온전히 예수가 드러나고 증거된다. 그래서 주님의 영광을 가리고, 예수에 이름에 먹칠을 하는 현대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심언행(心言行) 일치를 부단히 연습하고 실천해야 한다. 아니 생명을 걸고 개혁에 착수해야 한다.

종교적 사기꾼 집단, 개독교, 거짓과 위선의 종교라는 오명을 벗는 길은 이 길뿐이다.

우리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마지노선까지 내몰려 있다. 절대다수의 교회, 절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멸망의 길로 향하고 있다. 생존 자체를 위협 받는 작은 교회들이 널리고 널렸다.

젊은 세대들은 기독교를 외면한 지 오래이다. 신앙의 줄을 놓고 세류를 좇아 방황하는 불쌍한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우리 이웃, 내 가족, 내 자신이다. 무엇을 더 망설이는가? 진정으로 살고자 한다면 한가지 길밖에 없다. 상투적인 종교생활을 던져버리고, 바리새인의 탈을 벗어버려야 한다.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서 우리의 죄악을 직시하고 통회 자복해야 한다. 회개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정직한 신앙을 회복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소망이 있다. 살인죄와 간음죄를 통회 자복한 다윗은 “내 속에 정한 마음, 정직한 영”을 창조해 달라고 기도했다(시 51:10). 정직한 영, 정직한 마음을 구하는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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