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들의 경계대상 제1호는 말할 것도 없이 의처증 환자이다. 물론 여자목사들에게는 의부증 환자이다. 밑도 끝도 없이 어떤 남자가 삿대질을 하며, ‘왜 내 여편네를 탐내는 거야’ 하고 성도들 앞에서 대들면 그것으로 목회가 끝장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성경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다. 아내가 다른 남자와 관계했다는 의심이 들면, 남편은 제사장에게 고발하고 제사장은 즉각 그 여자를 성전에서 테스트를 해야 한다. 그런데 그 테스트 내용이 이상하다 못해 괴상망측하다. 긴 이야기를 줄이면 성전 바닥의 흙을 물에 타서 그 여자에게 마시게 한다. 그래서 여자의 허벅지가 마르고 배가 부어오르면 다른 남자와 간통한 것으로 확정된다. 따라서 돌무덤에 생매장되는 순서만 남아 있다. 행여, 아무 일도 없으면 남편의 의처증으로 진단이 난다. 그렇다고 남편에게 무슨 형벌이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민 5:11-31).

여성신학자들이 대표적인 여성 학대라고 비판하는 대목이다. 아무려나 이것은 일종의 원시적 거짓말 탐지기 아닐까. 가령 범인이라는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는 경우에 이와 비슷한 방법들이 사용되었다. 뜨거운 쇠를 맨손으로 들고 가게 하고, 맨발로 벌겋게 단 보습 위나 불타는 석탄 위로 강제로 걷게 한다. 덴 곳이 감쪽같이 없으면 무죄가 되었다. 혹은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물속에 발가벗겨 던져서 가라앉지 않으면 무죄가 되었다. 특히 살인범으로 지목되지만 증거가 전혀 없는 경우에는, 그에게 피해자 시체를 강제로 만지게 해서 시체에서 피가 흐르든지 혹은 시체가 움직이면 단연 유죄판결이었다. 유럽, 아프리카, 중동, 심지어 인도에서까지 있었던 시죄법(試罪法, ordeal), 곧 죄인인가 아닌가를 테스트하는 법이었다. 특히 마녀사냥에 대량으로 사용되었다. 루터 등의 교회개혁이 있기 전까지 별다른 반성 없이 활용되었다. 얼마나 억울한 사람들이 많았을까. ‘마녀사냥’이란 사건에서 확인된 것처럼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고문을 받으며 억울하게 죽었을까.

그렇다면 이런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해법은 무엇일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 회개하도록 유도하고 무한한 용서의 길을 보여 주신 것이 바로 예수님의 전략이었다. 성매매하다 현장에서 체포된 여자에게도 그랬고(요 8:1-11), 남편 여섯을 둔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그렇게 하셨다(요 4:18). 성매매의 원인을 제공한 남자들에게도 범죄의 책임을 선언하셨고, 회개하면 용서하셨다. 구약성경 시대에는 설혹 민수기에 적힌 그런 방법으로 해도 하나님의 개입으로 억울한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범죄자를 가려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범죄의 뿌리를 뽑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근원적 해법 아닌가.

불륜 사이트 가입이 들통난 미국의 교회지도자가 400명이 넘는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자살한 신학교 교수도 있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그분의 통곡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분통을 터뜨리는 우리는 그분 앞에서 정말 떳떳할까.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마음에 간음하였다’고 선언하신 그분 앞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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