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햇볕이 너무도 뜨거운데 쉽게 오아시스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기진맥진해 있었습니다. 아들은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렸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격려하면서 겨우겨우 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지쳤지만, 아들이 용기를 잃을까봐 내색하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겨우겨우 걸음을 옮기던 중이었습니다.

두 사람 앞에 무덤이 나타났습니다. 그 무덤을 보자, 아들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보세요, 아버지, 사람들이 이 사막을 다 건너지 못해 결국은 저렇게 죽고 말았어요. 우리도 아마 곧 저렇게 될 거예요.” 그러자 아버지는 침착하게 아들을 달랬습니다. “얘야, 무덤이 있다는 것은 이 근처에 마을이 있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는 사막을 거의 다 건넌 것이야.” 두 사람은 용기를 내어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이 나타났습니다. 아버지의 생각이 옳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절망스러운 상황일지라도, 그 이면에는 희망이 감춰져 있습니다. 그 희망은 아무나 찾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상황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희망을 찾으려 애쓰는 사람에게만 희망이 나타납니다. 무덤을 보고 주저앉아 버릴 것인가 아니면 무덤 건너편의 마을을 찾아 나설 것인가는 우리의 믿음과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새해를 맞이한 우리들은 새로운 희망을 품고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어두운 소식들이 많이 들려 옵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엄청난 한파와 지진 경고를 비롯해, 경제적인 어려움은 우리들의 마음을 주눅 들게 만듭니다.

그러나 고난과 역경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누구나 크고 작은 역경을 경험합니다. 질병, 불의의 사고, 인간 관계, 부부나 가족 문제, 경제적인 문제 등 누구나 다양한 역경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역경을 경험하는 이유도 다양합니다. 본인의 책임도 있지만, 주변 환경 때문이기도 하고, 이성으로는 원인을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도 있습니다. 왜 역경을 경험해야 하는지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여러 가지 고통의 원인이 인간의 죄, 특히 원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원죄를 위시하여 인간이 짓는 모든 죄를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담당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고통을 허용하시며, 역경이라는 터널을 통과하게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이러한 역경조차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시며, 궁극적으로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발전과 성숙을 위한 과정 가운데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경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이해, 대응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문제를 푸는 언약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크리스천’이란 사람이 ‘소망’이라는 친구와 함께 천성을 향하여 열심히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길이 너무 힘들고 고달팠습니다. 마침 널찍한 길을 만났습니다. ‘이리로 가면 되겠구나.’ 하고 생각한 두 사람은 넓은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점점 길이 좁아지더니 무서운 골짜기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골짜기에 다다르자 무서운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홍수를 만났습니다. 사면초가가 되어 버렸습니다. 앞으로 갈 수도 없고 뒤로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날은 어둑어둑 저물어 갑니다. 할 수 없이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웅크리고 앉아 날이 새기를 기다렸습니다. 피곤을 이기지 못한 두 사람은  깊이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뜨자 무서운 거인이 크리스천과 소망이 옆에 서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절망’이라는 이름의 무서운 거인이었습니다. “네 이놈들! 너희들은 내 영지로 무단 침입한 녀석들이야. 너희들을 가두어야겠다.” '절망'은 두 사람을 지하 감옥에 처넣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무섭게 매질을 하여 크리스천과 소망은 초주검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날 절망은 독약이 든 잔을 내밀며 “두 사람이 마시고 죽어라.” 하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버텼습니다.

다음날 절망이 찾아와 “날이 밝으면 뒷마당에 끌어내어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잠자리에 든 크리스천과 소망은 이 밤이 마지막 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새벽녘에 크리스천이 무릎을 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지금쯤 자유로이 걸어 다닐 수 있었을 내가 악취가 풍기는 지하실에 갇혀 있다니 이게 무슨 꼴인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이더냐! 이 의혹의 성안에 있는 자물쇠는 어느 것이나 열 수 있다는 보장을 받은 언약의 열쇠가 내 품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구나. 내가 아프다보니 고난이 낙심과 절망을 하게 만들어 언약의 열쇠를 망각하고 있었구나.”

크리스천은 급히 소망을 깨웠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품속을 더듬어 언약의 열쇠를 꺼냈습니다. 이 열쇠를 감옥문의 자물쇠에 넣어 돌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슬그머니 열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곳을 빠져나간 그들은 대문도 쉽게 열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날이 새기 전에 크리스천과 소망은 절망의 성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성을 향해서 다시 힘차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언약의 열쇠는 인생의 문을 여는 열쇠로서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내 길에 빛이요 내 발에 등이 됩니다. 말씀을 따라가면 이 세상을 이기며 천성까지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절망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기억나면 성도들은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믿음을 얻고 세상이 주지 못하는 놀라운 능력을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언약의 열쇠를 가지고 ‘소망’과 함께 천성을 향해 가야 합니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상도 변함없이 힘들 것입니다. 어려움이 다가올 때마다 우리가 붙잡고 나가야 할 영원한 언약의 열쇠, 영원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고, 우리의 모든 것입니다. 그분을 모시고 금년에도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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