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인 의미의 분별

사전적 의미의 분별(分別)은 사물이나 일을 구별하여 가르거나, 세상 물정에 대한 바른 생각이나 판단 정도로 정의된다. 즉 자연적인 환경에서 사람들이 의사 결정을 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정도를 흔히 분별이라 말한다. 예를 들어, 소방관이 화재 현장에 도착해 어디서부터, 어떤 방법으로 진화를 시작해야 하는지 분별하는 일, 병원의 응급실에서 일어나는 즉각적이고 적절한 조치들, 생명이 담보되지 않는 전쟁터에서 분초를 다투며 내려야 하는 결정들, 아이가 집에서 뜨거운 물을 엎질렀을 때의 응급조치라든가 직장에서 시간과 장소와 경우에 맞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요령들, 그리고 입시를 앞둔 학생이 어느 학교를 진학해야 하는지 등, 상황과 완급에 따라 중요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래서 사안에 따라 더욱 더 분석적이고 인지적인 분별이나 결정을 요구할 수 있지만, 전문가 그룹이 아닌 대개의 경우에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즉각적이고 반응적인, 직관과 경험에 의존한 분별을 말한다.

이런 자연적인 상황에서의 분별을 신앙의 영역으로 불러오면 그 뜻이 일상의 범위를 초월해 의식적이고 영적인(신비주의적인) 범위로까지 확대되고 그 의미 또한 다양해진다.

우선 분별력의 대가들이 말하는 정의를 보자. 로버트 A. 조나스는 헨리 나우웬(1932-96)의 사후에 발간된 『분별력(Discernment)』이란 책의 서문에서 헨리 나우웬에 대해 소개하며, ‘분별력은 우리의 가장 깊은 갈망들이 하나님의 뜻과 조율되는 내면의 소리를 듣고 반응하는 것’이라고 했다. 헨리 나우웬은 분별의 행위를 외적인 판단과 행동의 전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내적이고 영적인 반응으로 표현했다. 그는 늘 말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말씀하신다!” 문제는 그 목소리를 듣는 우리다.

평생을 필리핀의 예수회 신학대학에서 가톨릭 성인 이냐시오의 분별력에 대해서 가르쳐온 토마스 그린 신부(1932-2009)는 분별력에 대한 그의 명저 『밀밭의 가라지』에서, ‘분별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에서 기도와 행동이 만나는 점이다. 분별은 연극과 같다.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연습을 통해서만 숙달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분별이 단지 신비주의적이고 영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훈련(Spiritual Disciplines)』에 근간해 훈련하고 가르쳐왔다.

20세기 미국의 가장 탁월한 신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이자 목사인 라인홀드 니부어(1892-1971)는 그의 기도문을 통해,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현장 중심으로 사용되어야 하는 분별의 자연적인 결정을 강조했다. “주여,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소서. 그리하여 바꿀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는 냉정함과,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해 주소서.” 노동자들을 위한 투쟁의 현장에서 살아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현실적인 분별이었을 것이다.

토마스 그린이 『밀밭의 가라지』에서 인용한 책인『영들의 분별』의 저자 프랑스인 자끄 기예는 “분별은 이것과 저것 중의 하나를 고르는 게 아니라, 세 겹으로 쌓인 어두움, 즉 하나님이 보여 주시지 않고 명령하는 것과 사탄이 자신을 숨기고 유혹하는 것과 자신의 속마음조차 모르는 상태에서의 행동이 얼마나 심각한지도 모르는 것 사이에서(출 32:21, 엘하 12:7) 그에게 들려오는 목소리의 정체를 밝혀, 구별해내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자끄 기예는 우리들의 분별이 얼마나 모호하고 상대적이고 불확실한지에 대해 ‘삼중의 어두움’이란 표현을 사용해, 신앙인의 분별은 대단히 영적인 판단의 행위라는 것을 강조했다.

캐나다, 밴쿠버 리젠트 칼리지의 고든 스미스는 그의 책 『분별의 기술: 사랑(플러스, 2004)』을 통해, 분별력은 “둘 혹은 그 이상의 ‘선한’ 선택사항 중에서 한 가지를 구별해내는 선택”이라고 했고, 『영적 분별의 길』의 저자 엘리자베스 리버트는 여기에 ‘지금 이 순간에 가장 좋은 것을 추구하면서’란 단서를 덧붙였다. 이 두 사람이 공통으로 말하는 것은 ‘분별이란 대단히 현실적인 추구’이고(실질적이라는 말), 나아가 선하고 좋은 것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이지, 선과 악의 분별은 아니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선악의 분별은 너무도 분명하다는 것이다. 선함을 택할 것인가, 악함을 택할 것인가는 너무도 분명한 사안으로 이는 분별할 대상이 아니며, 악은 과감히 버리고 선은 과감히 취하면 될 일이지 고민할 게 아니라는 것이다. 악을 저지르는데 그 악을 모를 수가 있겠는가?

아담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하신 열매를 먹을 때 양심이 없었던가? 그랬다면 하나님이 “너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실 때 두려워 숨지도 않았을 거다. 가인은 또 어땠나? 양심이 없었다면, 야곱은 형 에서의 장자권을 훔친 뒤 도망쳐서 라반 밑에서 20년 동안 종살이를 하지 않았을 거다. 요셉의 형제들이 동생을 팔아 넘길 때, 그리고 팔아 넘긴 다음에 양심의 가책이 없었을까? 그랬다면 나중에 동생을 만나 용서를 빌지 않았을 것이다. 다윗이 부하의 아내를 취할 때 양심이 없었던가? 없었다면 왜 그의 부하를 전쟁터에 내보내 죽게 만들었겠는가? 유다는 또 어떤가? 예수님을 은 삼십 냥에 팔아 넘길 때 양심이 없었던가? 그랬다면 스스로 목메어 죽지 않았을 거다. 베드로는 어떤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때 양심이 없었던가? 그랬다면 나중에 슬피 울지 않았을 거다. 베드로와 바나바가 예수살렘 야고보에게서 온 자들의 눈치를 보느라 이방인들과 식사자리에서 멀어졌을 때 양심은 없었던가? 그랬다면 자신들보다 족보에서도 한참 밀리는 ‘새파란’ 바울한테 사람들 앞에서 혼날 일은 없었을 거다(갈 2:11-13). 우리가 십계명을 모르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듯 동일하게 이웃을 사랑할 줄 몰라서 못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죄를 알고, 우리의 수준을 알고,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줄 알고, 반대로 무엇이 이웃의 가슴에 못을 박는 줄 알고,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거짓맹세 하는 줄 알고, 무엇이 결국 하나님을 실망케 하는 줄 알고 그에게서 떠나가는 줄 안다.

사랑이 우리의 천성이라면 양심도 그렇다. 고로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몰라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고 싶은 마음이 그렇지 못한 마음보다 커서 그렇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아닌가? 따라서 선이냐 악이냐를 분별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악한 것은 못 배워서가 아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0의 말씀처럼,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는 것이다.” 선과 악의 문제에 있어서 더 이상의 분별도 없고 타협도 없다. 분별은 세상과 타협하거나 악과 타협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악마가 아니라)이 준비해 주신 좋은 것과 더 좋은 것 사이의 분별이어야 한다. 혹은 더 좋은 것과 가장 좋은 것 사이의 분별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지 않은 상황에서는 좋은 것을, 좋은 것들 사이에서는 가장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시며, 그렇게 끊임없이 예비해 주시기에, 우리는 분별이라는 통로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좋고 가장 좋은 하나님의 계획을 거저 선물로 받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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