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행함(7)

믿음과 행함의 관계: 잘못된 접근법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해답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구원에 있어서 믿음을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어거스틴주의, 믿음을 강조하되 행함의 부가적 역할을 인정하는 반(半) 어거스틴주의, 행함을 강조하되 믿음의 보조적 역할을 인정하는 반(半) 펠라기우스주의,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행함을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펠라기우스주의가 그것이다. 네 가지 신학적 견해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의 역할을 어느 정도까지 인정하느냐에 따라 구분된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한 각자의 입장을 결정하면 현대교회가 지닌 문제, 즉 믿음과 행함의 불일치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수많은 기독교 교파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위의 견해 중 하나를 정답으로 여기고 이를 고수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믿음과 행함의 문제를 극복한 개인, 교회, 교단, 교파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이성적, 신학적으로 생각하면 네 가지 견해 중 하나가 정답일 수밖에 없는데, 정작 현실에서는 어느 견해도 신통한 결과를 도출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문제에 대한 접근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잘못된 질문과 왜곡된 접근법은 필연적으로 엉뚱한 해답과 무기력한 해결책을 양산한다. 역사적으로 믿음과 행함에 대한 신학적 논쟁(펠라기우스 논쟁, 5세기 초)이 등장한 것은, 초대교회 300년 역사를 통해 지속된 믿음과 행함의 일치가 기독교의 국교화를 앞세운 세속 사회와 권력의 대대적 공세 앞에서 파괴된 이후이다. 믿음과 행함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생명의 문제이므로 통합적, 통전적, 유기체적 접근이 필요한데, 이성적, 분석적, 기계적인 접근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한 것이 문제였다. 이들은 현실에 대한 옹호 혹은 비판에 강조점을 두었고, 정작 무너진 기독교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현대교회에서도 현실 안주 혹은 옹호에 목숨을 건 현실옹호론자들과 현실에 대한 부정과 비판에 모든 에너지를 낭비하는 비관론자들이 넘쳐나지만, 정작 죽어가는 교회와 영혼을 살리려는 생명론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믿음은 나무, 행함은 열매

2천 년 동안 지속된 신학적 논쟁이 현대교회의 중병 치유에 큰 능력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 오히려 역사상 기독교의 부흥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복음의 능력에 대한 순수하고 단순한 갈망이었다. 믿음과 행함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신학자들의 복잡하고 모호한 설명과는 달리 대단히 간단명료하다. ‘믿음은 나무이고, 행함은 그 열매이다(요 15장). 또한 믿음은 그 열매, 즉 행함을 통해 진위(眞僞)를 알 수 있다(마 7:16-20). 참 믿음은 그에 합당한 좋은 열매를 맺는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 복음은 이처럼 놀랍도록 단순하고 명료하다.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가 선포한 복음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것은 바로 복음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으면, 그 믿음대로 행하고 그에 합당한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의 교훈을 어떻게 수납하는가 하는 것은 신앙의 정체성과 진위 여부를 판별하는 시금석이다. 즉, 삶 혹은 행함은 참 믿음을 증명하는 강력한 표지이자 증거이다.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 2:18)는 야고보서의 교훈은 참 믿음을 상실하고 화석화된 종교 생활에 안주하는 현대교회에 적확한 경고이다.

죽은 교리, 화석화된 종교는 가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고, 죽은 믿음은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약 2:14, 17). 삶과 행함이 결여된 신앙은 더 이상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니며, 화석화된 종교에 불과하다. 화석화된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그 독특성과 유일성을 상실하고 껍데기만 남은 이방종교와 다를 바 없다. 살아 있는 여호와 신앙을 상실한 유대교가 이방인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에 안주하는 현대기독교는 예수의 십자가 복음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세상 사람들처럼 맘몬(돈)과 바알(번영) 숭배에 몰두하고 있다. 돈과 번영을 추구하지 않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찾기 힘든 현실은 현대교회의 맘몬과 바알 숭배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웅변해 준다.

우상숭배에 빠진 현대교회가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애용하는 것이 교리(dogma)이다. 다양한 전통을 이어받은 현대교회의 교리는 그 긍정적 기능들(복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교육을 돕고, 이단 등으로부터 정통 기독교를 수호함)을 상실하고, 타락한 현실과 신앙에 대한 자기 방어와 합리화에 치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위험하다. 믿고 싶은 대로 교리를 만들고, 필요에 따라 교단과 교파를 만드는 것이 근.현대교회사에 드러나는 기독교의 전통이다. 현대교회는 살아 있는 신앙을 버리고, 맘몬과 바알을 숭배하며, ‘죽은 교리’로 그 치부를 가리고 있다. 따라서 현대교회의 갱신과 회복을 위한 첫걸음은 죽은 교리를 과감하게 던져버리는 것이다. 죽은 교리를 벗겨내야 탐욕과 물신숭배에 취한 현대교회의 추악한 민낯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썩어가는 환부를 소독하고 정화하고 수술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행함으로 믿음을 증명하라!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교회와 현대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지상과제는 삶과 행함으로 스스로의 믿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세속사회의 반(反)기독교적 정서와 문화에 대한 변증과 반론에 몰두하는 것은 귀중한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일이다. 이런 노력은 오히려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하는 궤변에 불과하다. 기독교가 맘몬과 바알숭배에 빠져 이방종교와 전혀 다를 바 없으면서도 기독교 신앙의 유일성과 독특성을 주장하는 것은 파렴치한 종교적 궤변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기독교는‘개독교’라고 불리는 것이 마땅하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외모, 외양, 물질, 종교, 제의, 전통, 교리, 건물, 돈, 지식, 명예, 권력 등 모든 종류의 인간적 가치와 외형적 기준을 초월한다. 기독교는 오직 예수에 대한 신앙(오직 믿음 Sola Fide)과 하나님의 은총(오직 은혜 Sola Gratia)에 의존하며,‘신앙’과‘은총’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통해 객관적으로 주어진다. 또한 성경을 통해 객관적으로 주어지고 성령의 조명을 통해 합당하게 해석된 계시는 기독교 신앙과 은총의 의미를 온전하게 드러내며, 모든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가치를 낮추고 상대화한다. 참 믿음을 가진 자는 신앙과 은총에 의지하여 현실의 죄악과 탐욕과 부패를 극복하고 상대화함으로써 스스로를 증명한다. 믿는 자는 그 믿음대로 살아간다. 믿는 자는 죄와 세상과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전진하며 마침내 승리한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에게 외친다: “행함으로 너희의 믿음을 증명하라!” 주님은 우리에게 경고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만 천국에 들어가리라!”(마 7: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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