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온니’는 막내 시누이가 나를 부르던 호칭이었다. 결혼 당시 시누이는 초등학생이었다. 꼬맹이 적에 부모님을 따라 이민을 왔으니 한국말이 서툴렀다. 어릴 적부터 경쾌한 걸음걸이와 환한 웃음의 소유자였다. 거리를 거닐면 만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빼앗아오기 예사였다. 그런 외모에 깜찍한 영어식 액센트로 나를 불러 줄 때는 참 기뻤다. 결혼 후에 생긴 새로운 호칭에 금방 친숙해진 것도 그 앙증맞고 귀여운 외모와 목소리 때문이었으리라. 세상에 많은 여자들의 호칭이 새언니겠지만 막내 시누이 특유의 엑센트와 톤으로 불러 주는 ‘새온니’는 나만의 이름 같아 무척 정이 갔다.

살아오는 동안, 부모님께서 주신 '효순' 이라는 이름 외에 많은 다른 호칭들로 내가 불려지곤 했다. 장난 좋아하는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으로부터, 생긴 모습이 다른 사람과 달랐기 때문에 붙은 이름도 있었다. 또 행동거지와 버릇으로 인해 얻는 이름도 더러 있었다.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 듣고 싶고 좋아하는 이름이 있다. 바로 막내시누이가 불렀던 '새온니'와 내 동생이 부르는 '호심' 그리고 작은오빠가 부르는 '호시아'라는 호칭이다.

내 바로 밑 동생은 말이 더뎠다. 어릴 적 식구들이 모두 ‘효순아’ 부르면, 말이 어둔한 어린 동생은 잘못 발음하여 ‘호시아’라고 불렀다. 그러다 타지에서 학교를 다니던 큰오빠가 방학이 되어 내려왔다. 동생이 누나라고 부르지 않는 흐트러진 기강에 깜짝 놀라며 질서를 잡았다.

동생을 앉혀 놓고 ‘효순이 누나’라는 단어를 훈련시켰다. 열 살도 훨씬 아래 적의 일로 기억되는데도, 그 순간이 영화처럼 떠오르는 것은 군밤을 맞고, 눈물을 흘려가며 따라 했으나 결국은 '효순이 누나'라는 말을 하지 못하던 동생의 안쓰러운 모습 때문이다.

질서를 포기하지 못한 오빠는 궁여지책으로 그럼 ‘효순이 누님’으로 해보라는 명령을 했다. 한참의 연습 끝에 동생은 겨우 ‘호심’이라고 입을 떼었다. 그 아이에게 내가 ‘호심’이 되는 순간이었다.

요즈음에도 제가 만들어 놓은 이름으로 이 누나를 잘도 부려 먹는다. 사업상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동생은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락이 뜸하다가도 글 쓸 일이 있으면 전화통에 불이 난다. '호심' 속에 무슨 좋은 것이라도 숨겨 놓은 듯, 넉살 좋게 힘 있는 목소리로 "호심, 호심" 해가면서 당장 뚝딱, 자기가 필요한 글을 내놓으라고 웃으며 으름장을 놓는다. 흥미 없는 분야의 어려운 글을 금방 써 내라고 졸라대면 슬며시 부아가 치민다. 부글부글 속이 끓어 큰소리 한 번 치려다가도 동생이 ‘긍게, 내가 전화 잘 안 해도 우리 호심은 잘 있제?’ 얼렁뚱땅 할라치면 끓던 속은 언제였던가. 내려가 버린다. 그렇게 '호심'이라는 소리가 마음을 녹여 버리는 것이다. 호심이라는 호칭은 나를 꼼짝 못하게 한다.

그 동생이 '호시아'에서 '호심'으로 바꿀 때 작은 오빠는 고등학생이었다. ‘호시아’가 ‘좋은 때의 아이’라는 아주 좋은 뜻이라는 그럴싸한 구실을 붙여 혼자 불러왔다. 습관 때문인지 지금까지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우리 집안에서 작은 오빠는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곤 했다. 줄줄이 많은 동생들의 질서를 얼굴 표정 하나로 다스릴 정도였다. 어금니를 꽉 물고 말할 때나, 눈 사이에 내천 자를 그리고 있을 땐 우린 조심하느라 오금을 펴지도 못했다.

그러다 아주 가끔, 나직하고도 길게 ‘호시아~~’ 하면 발소리 죽이느라 까치발 딛고 다니던 나는 물론이요, 작은 언니나 셋째 오빠도 긴장을 풀고 까불곤 했다.

정녕 작은 오빠의 해석이 맞았던 것 같다. 오빠 마음의 좋은 시간도 그 이름으로 우리에게 알려 주곤 했으며, 우리까지 좋은 시간을 갖게 했으니 말이다. 오빠가 결혼하여 분가하기 전까지 밖에 나갔다가 한 잔하고 집에 도착했다는 신호로 길게 불러준 이름이기도 했다.

이젠 우리가 같이 늙어간다. 그 무섭던 호랑이 오빠도 친구가 되어 버렸다. 만나면 오히려 내가 찧고 까불며 놀린다. 그러면 오빠는 이빨 빠진 호랑이마냥 편한 웃음만 웃는다. 어쩌다 어렵고 답답한 일 앞에서는 문득 그 느리고 길게 부르던 ‘호시아~~’를 듣고 싶어진다. 전화기 앞으로 달려가서 “오빠, 호시아~~ 허고 한번 불러 주소” 부탁을 하기도 한다. 호시아와 호심은 그리운 어린 시절을 데려와 역성 들어 주는, 나를 위한 이름이기에 정답기만 하다.

‘새온니’라고 부르던 초등학생 막내 시누이도 이젠 대학생의 엄마가 되었다. 그 발음이 ‘새언니’로 제법 세련되어졌다. 우리 사이도 문화와 언어의 차이를 넘어서 마음속에 있는 어려움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세월은 많은 것을 가져간다지만 시누이와 올케 사이를 아름답게 숙성시켜 주는 좋은 효소이기도 하다.

언제든 난 ‘새 언니’라 불리면 기분이 좋다. 자꾸만 불러 주었으면 참 좋겠다. 어떨 땐 듣고도 못 들은 척 더 부르게 한다. 그 이름 앞에서 조금은 수줍어진다. 새댁 시절의 낯설음이 되살아나는 탓이다. 무료한 내 삶에 갑자기 새로운 일이 펼쳐질 것 같은 활기를 준다.

난 아무리 늙어도 젊은 ‘새언니’다. 날마다 새로워질 것 같은 ‘새언니’다 조신하고 얌전한 사람일 듯한 '새언니’다. 육십 고개에 가뿐히 올라서서, 새각시가 되어보는 ‘새언니!’ 참 사랑스러운 이름이다.

이름으로 인하여 즐거워 하는 그때 강하게 스치는 생각 하나!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무슨 이름으로 나를 불러 주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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