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부활이 증언되어 있는 네 복음서가 모두 주후 60년대나 70년 이후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현장을 목격했던 사람들의 글이 아니고 후대에 구전을 통해 수록되었으므로, 사실적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그 무참했던 고난이나 십자가 고난마저 도외시하는가 하면, 그것도 꾸며낸 이야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문제는 이러한 가설들이 날이 갈수록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것으로도 모자라 적극적인 환영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부 신자들마저 이러한 가설에 현혹되어 고난 없는 부활을 주창하는가 하면, 부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예수는 초인간적 인간이어서 고난이나 육체적 아픔은 없었을 것이라며, 고통도 통증도 없는 십자가를 가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나 가설이야말로 추측에 불과한 이설이며,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격이다. 동시에 역사를 전공하고 깊이 있는 철학을 연구했다 하더라도 이것조차 그들의 상상이나 지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초등학문일 뿐이다. 선지자들의 그 방대한 예언과 제자들이 생명을 내놓고 죽으면서까지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다시 사심을 증언한 것을 어떻게 부인한다는 말인가?
시편기자의 예언을 들어보자.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을 인하여 기뻐하며 주의 구원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그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나이다. (...)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극히 높으신 자의 인자함으로 요동치 아니하리이다”(시편 21편 일부, 전체 내용 참고 바람).
이 기도를 읽으며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주님의 피땀 어린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아닌가? 또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시편 22편 일부, 전체 내용 참고 바람). 이 구절을 보면서 떠오르는 갈보리 산상의 역사는 삼척동자라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시편 24편을 보자,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 누군고 (...) 문들아 저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이 능한 여호와시로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상징하는 예언으로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 지면이 부족하여 다 열거할 수 없어서 그렇지, 천상천하를 막론하고 구약 전체에 흐르는 예수 고난과 부활의 예언과 증언을 부인하는 이들은 저능아 아니면 마귀의 후손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고난 없이 부활을 희망하는 오늘의 추세와 헛된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