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전쟁 승리 이후 독립군의 불만

1781년 10월, 독립 전쟁은 승리로 끝났다. 요크타운 전투에서 워싱턴 총사령관이 이끈 독립군이 영국군에게서 항복을 받았다. 하지만 영국과의 평화조약은 체결되지 않았고, 영국군은 철수를 미룬 채 아메리카에 계속 주둔하고 있었다. 7년의 긴 전쟁 기간 동안 고향에도 갈 수 없었던 군인들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여기에 더해 대륙회의가 약속한 봉급과 보급 물자의 지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병사들의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대륙회의는 실질적인 권한이 별로 없었다. 독립군에게 봉급과 물자를 지급하고 싶어도 조세 징수권이 없었다.

1782년, 요크타운의 승리 이후 일 년이 지나도록 파산한 의회 때문에 급료를 받지 못한 독립군인들은 국가가 배은망덕하다며 분노했다. 13개의 주 정부들은 연방정부의 약속을 그들이 이행해야 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다. 병사들과 장교들의 봉급이 7년이나 밀리고, 전쟁 이후의 연금 문제가 불투명해지자 독립군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더 이상 못 참겠다! 누구 때문에 우리가 목숨 걸고 전쟁을 했는데?” 이런 불만의 목소리는 “대륙회의를 쓸어버리고, 새로운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군사 반란을 일으켜 지금처럼 각 주에 독립권을 줄 게 아니라 아메리카 전체를 지배하는 정부를 세워야 봉급도 나올 것이고, 전쟁도 제대로 치를 것이라는 주장이 군대 장교들 사이에 팽배해졌다

뉴버그의 군사 쿠데타 음모

몇몇 장교들이 성급한 해결책을 가지고 조지 워싱턴 총사령관을 찾아 왔다. 1782년 5월, 루이스 니콜라(Lewis Nicola) 대령은 워싱턴에게 아메리카의 왕 조지 1세가 되어 줄 것을 요청했다. 니콜라가 편지에서“저와 여러 동료 장교들, 그리고 군 전체의 뜻”이라며 워싱턴에게 제안한 것은 조지 워싱턴을 아메리카의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는 것이었다. 니콜라 대령과 장교들의 요청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 당시 세계는 모두 왕이 지배하는 사회였고, 왕정만이 유일하게 인정받는 정부 형태였다. 그러나 워싱턴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자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 우리 군대가 그런 되지도 않는 생각을 하다니, 정말 비통할 뿐이네! 이야말로 이 땅에서 일어난 일 중에 가장 불행한 일일세. 그런 헛된 생각은 냉큼 집어치우기 바라네, (...) 전쟁 중에도 이보다 더 놀랍고 고통스러운 일은 없었네”

니콜라와 그의 측근들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워싱턴과 가까이 지낸 알렉산더 해밀턴은 자신들의 군사적 행동에 워싱턴이 가담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저는 대륙회의 대의원의 한 사람으로서 병사들에게 더 이상 보급품을 조달해 줄 수 없습니다. (...) 만일 아무런 조치 없이 이런 상태가 계속되고 평화가 온다면, 군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계획입니다. 병사들은 장군님이 지나칠 정도로 온건해서 자신들이 받아야 할 정당한 돈을 받는 데 방해가 될 뿐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제 불만에 가득차 고생하고 있는 병사들을 자제시키는 것 또한 어려운 일입니다. 장군님이 나서 준다면 결과적으로 이익이 될 것입니다.”

워싱턴은 고민에 빠졌다. 야망을 가지고 있는 워싱턴이었지만, 권력이 개인에게 집중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로마 역사에서 시저의 독재가 로마의 멸망을 가져온 것을 알고 있었다.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도 혁명 이후에 스스로 독재자가 되어 혼돈과 폐해를 영국 사회에 안겨 주었던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새로운 미국에 이런 폐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때 워싱턴이 왕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그는 왕으로 추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되기를 스스로 거절했다. 1783년 3월 초, 조지 워싱턴은 해밀턴에게 군사적 내란으로 유혈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1783년 3월 10일, 뉴욕의 뉴버그(Newburgh)에 있었던 독립군 본부의 숙영지에서 사건이 터지기 시작했다. 장교들에게 집회를 촉구하는 익명의 유인물이 돌았다. “만약에 평화가 선포되면 군은 해체되어 죽음만 있을 뿐이고, 전쟁이 계속되면 장교들의 뛰어난 리더십에 따라 군이 소망하는 세상을 얻을 수 있다”라는 내용이었다. 독립군 장교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과 음모를 계획했다: 영국이 평화조약에 동의할 경우에도 군대는 해산하지 않는다. 군대는 필라델피아로 행진하여 의회로 하여금 봉급 지불에 충분한 재정 확보를 위한 세금과 인세를 올리도록 한다. 만약 주 정부들이 이에 저항하면 총검의 맛을 보여 준다.

워싱턴 총사령관은 불법 집회가 질서를 해치는 행위라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 대신 1783년 3월 15일에 자신이 직접 병사들의 집회를 소집했다. 이 날의 집회는 미국 역사를 바꾸는 집회였으며, 인류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리는 집회이기도 했다.

왕이 되기를 거절한 야망의 조지 워싱턴

 
3월 15일, 수백 명의 장교와 사병들이 모였다. 워싱턴은 위험을 무릅쓰고 연단에 올라가 장문의 연설을 하며 이 반란의 부당함을 역설했다. 그는 군대가 의회와 대결해 싸운다면 아메리카의 후손들에게 비극의 악순환이라는 선례를 남기는 것이라고 말했다.“내란이라는 홍수의 문을 열어서 성장하고 있는 우리나라를 피로 물들이지 마라. 후손들이 제군들에게 인류를 위해 이룩한 찬란한 업적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오늘이 없었다면 세상 사람들이 도달할 수 있는 최후의 완벽한 단계를 결코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답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자”라고 워싱턴은 호소했다. 하지만 군사들은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워싱턴은 대륙회의 대의원이 보낸 위로의 편지를 기억하고, 그것을 주머니에서 꺼내 읽으려고 했으나 글씨가 작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며 편지만 쳐다보았다. 장교들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워싱턴이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은 측근들만이 알고 있는 안경이었다. “여러분, 제가 안경을 좀 써야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조국을 위해 전쟁을 하다 보니 머리는 백발이 되었고, 눈은 장님이 될 정도로 침침해졌습니다.”

이 말과 그의 꾸밈없는 소박한 행동에 그곳에 모여 있던 수백 명의 장교와 사병들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군인들의 쿠데타는 실현되지 않았다.

영국의 크롬웰은 명예혁명이 끝난 뒤에 권력을 이양하지 않고 스스로 집정관이 되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역시 민주화 혁명을 통해 부상했으면서도 권력을 이양하지 않고 이전 군주들을 능가하는 권력을 누렸다. 소련의 레닌, 중국의 마오, 베트남의 호치민, 쿠바의 카스트로 등도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킨 후에 조용히 권력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한국의 박정희와 김일성 역시 그들 스스로 혁명을 도모한 뒤에 권좌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러나 조지 워싱턴은 스스로 최고 권력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돌아갔다. 훗날 제퍼슨은 이 일을 언급하며, 워싱턴이 아니었으면 미국의 자유는 수호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원하기만 하면 그는 왕이 될 수 있었다. 독립군 총사령관을 지낸 워싱턴은 군대를 갖고 있었고,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대륙회의와 주들은 대륙군에게 맞설 무력이 없었다. 그 당시의 보편적 정부 형태는 왕이 다스리는 입헌군주제였기에, 왕이 되는 기회와 권력은 그의 손 안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역사를 위해서, 1783년 12월 23일에 대륙의회에서 스스로 총사령관의 지휘검을 반납하고 마운트 버논의 농장으로 돌아갔다. 젊은 날에는 야망이 컸던 워싱턴이지만, 스스로 권력의 욕망을 내려놓은 그의 절제가 역사의 물줄기를 돌린 것이다.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난 그는 역사의 영웅으로 영원히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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