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서 거리 전도를 했다. 한국식품점 입구였다. 어깨띠를 두르고, ‘예수 믿으세요, 예수 꼭 믿으세요’ 하고 권고했다.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그런 글을 담은 전도지도 나누어 주었다. 반응은 여러 가지였다: 수고가 많다, 신자들에게 맡기지 뭘 담임목사가 직접 나섰느냐, 전도지를 집에 가서 꼭 읽겠다, 한 번 방문하겠다.

하지만 반발도 있었다. 혹시 이단교회는 아니냐? 공연히 귀찮게 굴지 말라고도 했다. 게다가 전도지를 박박 찢어 땅바닥에 휙 던져버린 사건도 있었다. “그 놈의 예수 귀신이 태평양에 빠져 죽지도 않고 여기까지 건너왔네.” 삼십대 여성의 도발이었다. 힐끗 쳐다보니 얼굴에는 분노와 고통이 섞여 있었다. 그때부터 그녀에게 예수님을 제대로 소개해야 하겠다는 의무감이 생겨났으나 만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기독교에 대하여 거부감이나 적개심을 가진 이들이 어찌 그 여성뿐일까. 특히 지금은 수난절과 부활절로 교회들이 제철을 만난 때이다. 하지만 기독교와 악연을 가진 이들에게는 상처에다 소금을 뿌리는 계절이 되리라.

예수에 대한 오해는 결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마리아가 모태에 잉태할 때부터였다. 로마 군인과 유대인 창녀 사이에 출생한 사생아, 학교 문 앞에도 못 가본 일자무식,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과대망상증 환자, 아내를 여러 명 거느렸던 추악한 여성편력가, 앞뒤가 맞지 않는 황당한 연설가, 불도의 제자였다는 서적들이 나와 있으며, 요즈음에는 동성애자의 선배였다고 우기기도 한다.

만약 그런 주장이 옳다면 예수라는 이름은 역사에 한 조각도 남지 않아야 했다. 나사렛 시골 동네에서 목수 노릇 하다가 죽은 무명인사일 뿐이리라. 특히 로마 황제 네로의 혹독한 박해 때, 기독교를 아편이라던 공산당 혁명 때, 그리고 세상 즐거움에 푹 빠진 이 시대에는 정말 ‘예수의 씨’가 바싹 말라야만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예수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따른다. 특히 지난 2천 년 동안 이 세상에 출판된 인물 서적 가운데 감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이 바로 ‘예수 연구’이다.
예수님의 생애는 십자가와 부활이 그 핵심이다. 십자가에는 예수에 대한 증오심의 총체가 걸려 있고, 동시에 사랑의 총체가 걸려 있다. 그 총체적 증오심과 총체적 사랑의 격전장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다. 그리고 부활은 바로 사랑, 그것도 완전한 사랑의 최후 승리를 선언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나만주의자(egoist)의 화신이 된 자기를 통째로 십자가에 처형하는 일로 시작된다. 그리고 너만주의자(human being for others)가 되신 그분처럼 새롭게 살아가겠다는 자기 혁명으로 열매 맺는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신자들은 물론 미신자와 반신자들에게도 엄숙하게 물으신다. “너는 이기주의자의 원흉인 너 자신을 죽이고 이타주의자의 모범으로 다시 살아나지 않겠는가.” 그분에게서 그런 순수하고 드높은 사랑을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만 한 조각이라도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예수 공부의 본전은 넉넉히 뽑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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