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분별의 주체가 되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동의의 문제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분별하고 결정할 때 누구와 같이 하는가? 아니면 혼자 하는가? ‘누가 분별하는가’의 이 ‘누구’의 정체가 세상에서 말하는 의사 결정인지 기독교의 분별인지를 구분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크리스천의 분별이 이 세상의 의사 결정 기법과 다른 것은 나의 문제를 나 혼자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웬 말? 분별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 하신다고 믿는 것이다. 왜? 헨리 나우웬이 무덤까지 가지고 간 그의 기본적인 믿음과 같이, 하나님은 늘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인지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자기실현적 예언’에 깊이 뿌리 박혀 사는 21세기의 인간 중심적이고 논리적인 인간들에게, 우리 일을 우리가 결정하지 않고 타자, 그것도 뜬구름 잡듯이 하늘에 계신, 혹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과 같이 한다고 말하면, 이는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욕만 먹을 것이다. ‘우리 외에 우리를 위해 분별하고 결정하는 자가 누가 더 있단 말인가?’

영국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소요리문답(칼빈 전통의 장로교회에서 사용하며 1643년, 영국 웨스트민스터에서 만들어진 신자들의 신앙고백서. 특히 평신도들을 교육하기 위함) 중 첫 번째 질문은, “사람의 첫째가는 목적이 무엇인가?”이고, 그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분별과 결정의 모든 과정 역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  내 가족을 위해서? 내가? 턱도 없는 이야기다. 영성훈련의 고전인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훈련』23번에도 이 훈련의 원리와 기초로 인간들이 창조된 목적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외하고 섬기도록 창조되었으며, 그러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다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만 올려드리면 되고, 그리고 난 다음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모든 것은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너희들은 따라오기만 하면 돼!’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인격적이시다’라는 것은 우리의 의지를 인정하고 우리의 자발적인 참여를 기대하신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크리스천의 분별의 주체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시나, 현실적으로 분별은 하나님과 우리의 공동의 작업이 된다. 『분별의 기술』의 고든 스미스의 비유를 빌려오면, 그렇기 때문에 ‘분별은 하나님과 춤을 추는 것이다.’ 춤을 혼자 출 수는 없지 않은가? 춤을 인도하시는 이는 결국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완벽한 춤 선생을 만난 것이다. 우리가 그에게 우리의 몸과 마음을 맡기면 맡길수록 가장 훌륭한 춤사위가 펼쳐지게 된다. 조심할 것은 우리가 그분을 리드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인격적인 하나님은 우리에게 춤을 강요하시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분별의 과정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은 자이고, 그 결과를 듣고 행위로 옮기도록 격려 받는 자일 뿐이다. 우리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면, 그래서 우리가 주님이라고 고백한다면, 우리의 모든 분별의 주체인, 우리의 춤 선생님인 하나님을 무시해선 안 된다. 분별의 시작과 과정과 결과의 모든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시종을 그분과 같이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를 '하나님의 분별의 과정에 포함시켜 주셨다', ‘공동의 분별자로 초청해 주셨다,’라고 고백하는 게 정직하고 겸손한 대답이다.

이런 논리가 불편한가? 여전히 우리의 마음 가운데 ‘그럼 나는 뭐야?’라는 마치 독사와 같은 의심의 머리가 꿈틀대는가? 자욱한 안개 속에서 줄타기를 하듯 불안하고 초조한가? 다시 곰곰이 생각해봐라! 나는 지금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분별을 해야 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결정을 해야 한다. 일생일대의 중차대한 일이다. 머리가 복잡하다. 경우의 수가 너무 많다. 아니면 하나도 없다. 길이 보이기는커녕 캄캄한 터널 속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기분이다. 맞은편에서 기차가 뿌욱 하면서 연기를 뿜으며 달려온다. 초조하다. 주변에 물어보거나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다. 아니 누군가가 있다 해도 속시원한 답을 줄 수 없다. 그리고 너무 개인적인 일이어서 교회 안에서도 나누기가 어렵다, 자, 이 문제를 누구와 상의할 것인가? 여전히 이 문제를 ‘내’ 손 안에 쥐고 있는가? 손에 땀이 나는가?

크리스천의 분별의 출발점은, ‘나의 문제를 누가 분별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이해이자 각오이다. 이 ‘누구’가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모든 분별의 과정이 뒤엉킨다. 이 출발점부터 잘못되면 죄의 결과가 그런 것처럼, 끝도 좋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어떤 결정이나 분별의 결과가 본인이 생각한 것보다 월등하게 좋게 나왔다고 하자.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거나, 투자해서 대박이 났다거나, 교인수가 하루아침에 천문학적으로 올라갔다면, 하나님이 세상에 엄청난 축복을 내려주신 것처럼 그럴싸하게 둔갑시킨다. 하지만 이건 축복이 아니라 신성모독이다!! 아니면 본인 스스로 엄청나게 비현실적인 목표를 정하고 거창한 비전을 선포한 다음에 마치 도박판에서 슬쩍 밀어 넣는 포카처럼 하나님을 은근슬쩍 중간에 끼워 넣고는, 되든 안 되든 결과는 하나님이 책임지라고 윽박지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홀한가?

우리의 자아가 소중하고 우리의 삶에 남아 있는, 익숙한 것들과의 과감한 결별이 두렵다면, 그래서 하나님과 같이 분별의 여정을 떠나기가 두렵다면, 다시 우리의 과거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예수님을 만나 영생의 비밀을 알기를 원했던 그 청년처럼, 결국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간 바로 그 청년처럼 우리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만다. 우리의 보물 있는 그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마 6:21). 우리의 과거는 아마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세상중심적인 삶이었을 것이다. 그런 삶으로 돌아간다면, 하나님과 우리의 이중적인 삶의 고통과 딜레마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자, 어디로 갈 것인가? 자기중심적인 과거로 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기는 미래로 갈 것인가?

기독교적인 분별을 갈망하는 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분별하시도록 우리의 문제를 내어 맡기고, 그분의 결정에 따라, 그것이 비록 우리가 바라던 결과가 아닐지라도, 주님의 십자가를 메고 가는 고통으로 점철되더라도, 묵묵히 그 결과를 인내하며 받아들일 의지가 굳건한 자들이다. 이러는 것이 우리를 공동의 분별자로 초대해 주신 초대자 하나님에 대한 초대된 자의 기본적인 자세이다. 그렇다고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너무 비장할 필요만은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는가? 마틴 루터가 말했듯이, 그분은 “우리가 은을 위해 기도하지만 우리에게 은 대신 금을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을 아직도 못 믿는가?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너희 중에서 누가 돌을 주겠느냐?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누가 뱀을 주겠느냐? 비록 너희가 나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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