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를 선포하지 않는 강단

2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설교와 말씀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를 통해서 수많은 설교와 말씀에 대한 정보가 떠돌고 있다. 그러나 정작 온전한 복음, 순수한 말씀을 찾아보기는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특히 인간의 본질적 죄성과 온갖 종류의 죄악에 대한 예리하고 준엄한 경책과 그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나 말씀은 희귀하다. 위로와 거짓 평안과 축복과 번영을 좇아 방랑하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귀에 듣기 좋은 말씀을 찾아 지금도 헤메고 있다. 이들을 대상으로 강렬한 어조로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강심장의 목회자는 천연기념물이 된 지 오래이다.

죄와 죄인에 대한 심판의 선포, 그리고 진정한 회개에 대한 선포가 결여된 강단은 필연적으로 죄에 대해 무감각하고 방종한 신자들과 교회들을 양산한다. 양심에 화인을 맞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상실한 신자들, 타락과 부패와 탐욕과 온갖 음란과 분쟁과 싸움으로 추문의 근원지가 된 교회가 죄에 대한 심판과 회개를 촉구하는 순수 복음을 회개가 빠진 반쪽자리 복음으로 대체한 결과물이다.

복음의 두 기둥: 회개와 믿음

세례요한이 등장한 때는 화석화된 신앙의 바리새파와 번영과 물질과 권력을 추구하는 사두개파가 득세하던 시대였다. 그 시대를 향해 세례요한이 선포한 복음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3:2)는 메시지였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도 세례요한과 동일한 회개의 복음을 전파했다(마 4:17; 막 1:15). 특히 예수님은 복음의 두 기둥으로 회개와 믿음(막 1:15)을 선포하셨고, 복음을 축약하여 제시할 경우 ‘회개’를 중심축으로 삼으셨다(눅 24:47).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최우선 주제 역시 ‘회개’(행 2:38, 3:19, 5:31)였다. 또한 바울이 전한 복음의 두 기둥도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에 대한 믿음’이었다(행 20:21). 한 마디로 회개는 신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복음의 핵심적 주제이며, 믿음과 더불어 복음의 두 기둥으로 간주되었다. 복음은 죄인을 회개로 이끄는 부르심이자,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이끄는 부르심이다.

예수님은 회개를 구원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보았고, 참 복음이 선포될 때 유발되는 결과로 인식했다. 주요 종교개혁자들도 모두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칼빈은 회개와 죄용서를 복음의 주요 주제로 간주하고 회개와 죄용서 없는 믿음은 열매없는 무익한 것이라고 단정했다. 따라서 회개를 배제한 채 선포되는 복음은 구원에 이르는 참 믿음이 아닌 열매 없는 무익한 믿음을 양산할 뿐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복음에서 회개는 믿음과 더불어 필수불가결한 양대산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믿음에 선행하는 긴급성을 띠고 있다.

회개에 대한 오해들

현대교회에 널리 퍼진 회개에 대한 여러 오해들이 있다. 가장 크고 뿌리 깊은 것은 회개를 율법적 차원에서 이해하고 그 가치를 격하하는 것이다. 이는 루터로부터 시작된 율법과 복음의 이분법이 초기의 차원 높고 체계적인 의미를 상실하고, 후대에 이르러 피상적이고 기계적인 지식으로 전락한 데서 비롯된다. 루터가 이신칭의라고 하는 협의적 복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율법을 폐기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역할과 기능을 한다고 보았다. 회개를 율법적 차원에서 이해할 때, 회개는 복음의 자유를 방해하는 율법주의의 잔재로 인식된다. 그러나 회개를 이렇게 오해하여 복음에서 회개를 배제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필연적으로 죄에 대한 무감각, 타락, 그리고 방종으로 귀결된다. 이는 종교개혁 당대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드러난 보편적인 역사적 사실이다. 따라서 회개는 청교도 토마스 왓슨이 강조한 것처럼 ‘복음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복음의 핵심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회개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오해는 회개를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일어난 과거의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영접기도를 할 때 죄인됨을 고백한 것이 회개라고 여기는 오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는 성경이 말하는 회개와는 전혀 다르다. 성경이 말하는 참 회개는 단순한 죄인됨의 인정이나 과거에 일어난 단회적 사건이 아니다. 참 회개는 죄와 죄악된 본성을 버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요, 삶과 존재의 전 영역에서 죄와 단절하고 철저히 의와 거룩을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참 회개는 단회적인 과거의 사건이나 고백이 아니라 일생을 거쳐 지속적으로 실천되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절대적인 과제이다. 그러나 이런 의미의 회개를 인간 행위의 열매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참 회개는 참된 거듭남(중생)의 열매이며, 복음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따라서 참 회개의 열매는 중생의 여부를 판별하는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지속적인 회개와 삶의 변화, 그리고 죄와의 투쟁과 단절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참된 중생을 경험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회개의 복음을 선포하라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후안무치의 철면피로 취급되고, 교회가 수많은 문제와 타락과 분쟁이 발생하는 복마전으로 간주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를 박해하는 세상의 악함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죄라고 인정하지 않고 죄에서 돌이키지 못하는 우리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상의 비난과 질시와 박해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채찍이요, 심판에 대한 경고이다. 주님은 그 백성을 회개시키려고 온 세상을 격동하여 기독교의 치부를 드러내시는데, 정작 교회는 자신의 죄악을 은폐하고 합리화하기에 급급하다. 그래도 가려지지 않는 수많은 죄악에 대해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 모든 죄를 이미 용서하셨다’는 기만적인 믿음을 굳건하게 붙드는 모습으로 일관한다. 타락한 교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다가올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와 심판을 경고한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복음의 메시지이다.

목회자들은 다시 회개의 복음을 붙들고 씨름하고 회개의 삶을 실천해야 한다. 회개의 열매를 맺고 강단에서 회개의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양들의 귀를 즐겁게 하려는 유혹을 뿌리치고, 양떼들이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워 승리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회개의 복음이 지속적으로 선포되는 곳에 진정한 변화가 일어난다. 죄에 신음하는 자가 죄를 버리고 거룩으로 나아갈 것이다. 죄악의 공동체가 의와 거룩과 사랑의 공동체가 될 것이다. 악취나는 교회가 세상을 구원할 빛과 소금이 될 것이다. 회개의 복음을 붙드는 자가 세상과 죄악을 이기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회개의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 진정한 부흥이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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