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워싱턴의 인격과 신앙(5)

한국 현대사의 얼룩, 권력욕

권력은 얼마나 좋은 것일까? 권력의 맛에 취하면 왜 사람들은 벗어나지 못할까? 현재 미국의 민주당 대선 후보중 하나인 힐러리 로댐 클린턴은 상원의원 시절에 쓴『살아 있는 역사』라는 자서전에서 인간과 권력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 준다.

‘퍼스트 레이디가 된 뒤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한 젊은 보좌관이 물었다. “방에 어떤 음료를 넣어드릴까요?” “다이어트 닥터 페퍼.” 그 후 몇 년간 어딜 가나 호텔방의 냉장고를 열어보면 다이어트 닥터 페퍼 캔이 가득 들어 있었고, 사람들은 이 음료를 채운 유리잔을 가지고 내게 다가왔다. 마치 내가 판타지아에 나오는 미키 마우스처럼 마법사의 제자가 된 기분이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필요 이상의 행동을 한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권력을 맛본 사람은 그 자리, 그 영화, 그 과거를 잊지 못한다고 한다.’

리차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그의 저서 『20세기를 움직인 지도자들』에서 “단 한 번이라도 권력의 맛을 본 대부분의 정치가들은 죽어도 그것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상하 의원들은 은퇴하거나 선거에 패배해도 고향에 돌아가길 꺼리면서 워싱턴과 권력 주변을 맴돈다.”고 말했다.

권력은 그렇게 사람들을 유혹한다. 한반도는 권력욕에 눈이 먼 사람들에 의해 피로 얼룩진 현대사를 갖고 있다. 북한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일인 독재, 일당 독재의 시대를 열어 세계 역사에 전무후무한 3대 세습 독재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권력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 권력에의 욕망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준다. 남한은 어떠한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무리수를 두어 헌법을 고치거나 부정선거를 통해 권력을 연장하려고 했다. 그 결과 4.19 혁명이 일어났다. 그러나 되찾은 민주주의는 권력에 눈이 먼 박정희 소장의 5.16 군사 쿠데타(1961년)로 무너지고, 군사정권은 유신헌법을 만들어 18년간 장기독재, 철권통치를 하였다. 박정희 암살 이후, 역시 권력욕에 눈이 먼 전두환과 노태우는 1979년에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켰고, 1980년 5월 18일에는 무고한 광주시민을 대량학살하고 권력을 찬탈했다. 이렇듯 한국의 현대사는 1945년 해방 이후 1993년에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 피를 흘려야 했다. 권력에의 욕망이 빚어낸 비극이자 얼룩진 우리의 모습이었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캄보디아의 폴 포트, 우간다의 이디 아민, 자이르의 모부투 세세 세코,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에셰스쿠,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아이티의 장클로드 뒤발리에, 필리핀의 페르디난도 마르코스,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쿠바의 풀헨시오 바티스타, 포르투갈의 안토니우 두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파라과이의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 한국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일성은 나라와 시대는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처음에는 혁명의 이름으로, 자유의 이름으로, 번영의 이름으로 권력을 잡았지만, 일단 권력을 쟁취하면 권력에 취해 그 권력으로 국민의 자유를 박탈하고 억압했다는 것이다. 또한 권력을 독점하려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점이다.(참조: 김형곤, 『조지 워싱턴의 정직의 힘』서울:새문사, 2012, 190-191)

자유를 위한 행진, 겸손한 인격

 
조지 워싱턴은 20살에 버지니아 민병대의 부대장직을 맡았다. 43살에 독립혁명군의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1781년, 요크 타운 전투에서 독립혁명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영웅으로 급부상했다. 군인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왕이 될 것을 요청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군대 장교들은 무능한 대륙의회를 해산하고, 입헌군주제를 만들어 조지 왕이 되어야 한고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러나 조지 워싱턴은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 역시 신분 상승과 성공을 꿈꾸었지만, 개인의 욕망보다는 만인의 행복을 추구했다. 개인의 영예보다는 공동선을 추구했다. 이를 위해 조지 워싱턴은 총사령관직을 사임해야 한다는 결심을 굳혔다. 의회도, 군대 장교들도 그에게 사임 압력을 가한 적이 없다. 스스로 결단한 것이다. 이것이 미국 역사의 큰 흐름을 결정짓는 위대한 사건이 되었다.

1783년 12월 23일, 워싱턴은 매릴랜드 아나폴리스에서 열린 대륙의회에서 지휘검을 반납하고 총사령관직을 사임했다. 워싱턴이 사임 연설문을 읽기 시작했을 때 그의 손은 떨렸다. 그는 미 합중국이 이제 “존경받는 나라”가 되어 “자신 없이” 억지로 받아 들인 자리에서 “만족스럽게” 물러나게 되어 무척 행복하다고 말했다. 또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대의가 분명했고, 의회의 지원이 확고했으며. “하늘의 도우심”이 함께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독립을 위한 싸움의 장면들을 회상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구해 주시고 대의를 지킬 수 있게 해주신 데 대한 감사가 북받쳐 오른다고 말했다. 마지막까지 곁에 남아 준 참모들에게 의회가 호의를 베풀어 줄 것을 요청할 때에는 그의 목소리가 잠겼다. 목소리는 잠기고 감정이 격해진 그는 다음의 마지막 문장을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이 나라의 안위를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에 의탁하며, 백성들을 치리할 관리자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보살핌이 함께하기를 기원하며, 오늘 이 마지막 엄숙한 의식을 통해 저의 공식적인 생애를 마감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나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한 의회 의원은 애인에게 보낸 편지 중에 이렇게 기록했다. “장내가 모두 감동했다. 청중이 모두 울었고, 의원들 가운데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Thomas Fleming, The Greatest Moment in American History, The Journal of American Revolution, March, 2013)

의회 의원들은 워싱턴이 권력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자유를 향한 신념과 겸손한 인격이었다. 자유로운 미래에 대한 신앙은 하나님 신앙에 의해 유지되었고, 훗날 첫 번째 민선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힘이 되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미국의 국부로서 조지 워싱턴의 인격과 지도력이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군대의 총사령관직에서 물러난 워싱턴은 버지니아의 Mountain Vernon에서 정원을 가꾸며 조용히 은퇴 생활을 즐겼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고 권력을 탐하지 않았지만, 국가는 그를 다시 국부로 불렀다.

조지 워싱턴은 로마 시대의 줄리어스 시저가 아닌 킨키나투스(Cincinnatus)가 되었다. 킨키나투스는 원로원이었고 농장주였는데, 로마가 외적으로 인해 위기에 처했을 때 독재관으로 임명되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 다시 농장으로 돌아갔다. 미국의 신시내티(Cincinati)라는 도시 이름은 조지 워싱턴이 킨키나투스의 모범을 따른 것을 기념해 붙여진 이름이다.

조지 워싱턴의 사임 소식을 들은 유럽의 지도자들은 충격에 빠졌다. 영국의 조지 3세는“조지 워싱턴이 (총사령관직에서) 사임한 게 맞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토마스 제퍼슨은 미국 혁명을 되돌아 보면서 조지 워싱턴의 역할에 대해“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유를 수립하려다가 그 자유의 전복 때문에 혁명이 막을 내리는 상황 속에서 그것을 방지할 수 있는 온건함과 덕성을 함께 지닌 단 하나의 인물”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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