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장로교 최고의 신학자이며, 유명한 부흥사인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는 노덤턴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된 후, 23년간 사역하면서 ‘대각성(Great Awakening)’이라는 신앙 부흥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런 그가 교회의 배척을 받게 되어 47세인 1750년에 목사직을 사임했습니다. 새로운 사역지를 구하지 못한 그는 그 교회에 남았습니다. 그의 부인이 뜨개질을 하면서 열 명의 자녀들을 근근히 키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 교회가 다시 도와 달라고 했을 때에는 또 겸손한 자세로 도왔습니다. 그 후 에드워즈 목사는 스톡브리지라는 고산 마을의 작은 인디언 교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7년간 목회를 하는 동안에도 에드워즈 목사는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1757년, 미국의 유명한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는데, 그는 여전히 겸손했습니다. 그는 지위가 높았을 때에도 겸손했고, 낮아진 때에도 겸손하여, 기독교계에서 겸손한 인물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세상에 흘려보내기 위해서는 겸손이라는 그릇이 필요합니다. 창세기 3장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 세상에는 죄가 만연했지만, 하나님의 은혜 또한 세상에 흘러 넘쳤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크고 넓어서 마치 바다와도 같지만 겸손의 그릇에 담아야 이웃에게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자신을 낮추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겸손의 그릇에 담아 모두에게 흘러가도록 합니다.

기독교사에서 성인이라고 불리는 어거스틴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가서 질문했습니다.
“신앙 생활에서 첫째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겸손입니다.”
“둘째는 무엇입니까?”
“겸손입니다.”
“그럼 셋째는 무엇입니까?”
“셋째도 겸손입니다.”

어거스틴은 “천사를 마귀로 만든 것은 교만이며 인간을 천사로 만든 것은 겸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겸손은 모든 미덕의 바구니”라고도 했습니다. 사랑도, 자비도, 충성도, 온유도, 절제도, 인내도, 양선도 겸손이라는 바구니에 들어갈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은 모든 덕행의 기초가 되고 겸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겸손이란 한 마디로 자기자신을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특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것을 뜻합니다. 겸손은 비굴함도 자기학대도 아닙니다. 또한 겸손은 자기를 낮추는 듯하면서 실은 자기를 높이는 위선도 아닙니다. 겸손은 진정으로 상대를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전북 김제시 금산리에는 한국교회사에서 중요한 자료인 금산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우선 ‘기역자(ㄱ) 형’건물로 유명합니다. 남녀의 자리를 구분하기 위해 예배당을 기역자로 지었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교회의 초창기에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1908년, 미국 남장로회 전주 선교부의 데이트(Lews Boyd Tate) 선교사가 이곳에 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때 그 마을의 유지요, 재력가요, 한학자로 이름을 떨치던 조덕삼과 그의 마부로 머슴 생활을 하던 경상도 출신 이자익이 함께 예수를 믿게 됐습니다. 주인과 머슴이 함께 교회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해서 장로를 선출했을 때 머슴 이자익은 피택이 됐는데, 양반 조덕삼은 떨어졌습니다. 주인 입장에서 창피하고 질투심이 날 만도 한데, 조덕삼은 진심으로 기뼈하고 이자익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듬해 조덕삼 역시 장로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조덕삼은 이자익을 선임 장로로 받들고 교회를 잘 섬겼습니다.

조덕삼은 이자익이 신학교에 들어가 신학 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기까지 물질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훗날 이자익은 목사가 되었고 교단의 총회장이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한 번도 선출되기 어려운 총회장을 13회, 33회, 34회 세 번이나 역임했습니다. 조덕삼은 이자익을 늘 겸손하게 섬겼습니다. 조덕삼의 손자가 바로 국회부의장을 지낸 바 있는 조세형 장로입니다. 조덕삼 장로처럼 진심으로 남을 인정해 주고, 높여 주고, 자신을 바로 깨달아 낮출 줄 아는 것, 이것이 겸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 스스로는 쉽사리 겸손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겸손하다는 것은 자기 의의 또 다른 모습일 수 있습니다. 고난과 고통을 겪으면서 깨달음을 통해 겸손해질 수 있지만, 인정받고 싶고, 높아지고 싶고, 자기 유익을 추구하고 싶은 자기중심성은 늘 마음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첫 아담의 후손이고 존재의 뿌리가 바로 아담이어서, 우리 안에는 아담의 성품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 남들보다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 즉 교만은 아담의 성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내가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듯, 교만 역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면에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만은 계속 자라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후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의 뿌리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담의 성품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훈련을 통해서 둘째 아담의 성품을 빚어가야 합니다.

주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겸손을 배워서 우리의 성품 안에 겸손을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우리의 롤모델로 삼아서 배우되, 특히 주님의 겸손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이 겸손을 배우려면,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성령님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겸손해야겠다, 낮아져야겠다 하면서도, 어느 순간 남과 비교하고 남보다 높아지려는 교만이 마음 속에 저절로 생기는가 하면, 남보다 못하다고 여겨질 때에는 저절로 자신이 초라해 보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말만으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신앙이 성숙한 만큼 겸손도 성숙해집니다.

예수님은 근본이 하나님이시나 그 본체를 인간의 차원으로, 게다가 사람들이 끔찍하게 싫어하는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겸손이셨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것을 이 땅에 담아내는 그릇은 바로 겸손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시고 나아갈 때 비로소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님을 본받고,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 주는 진리를 깨닫고, 늘 겸손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며, 천국까지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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