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양’의 메시지

2007년에 개봉한 영화 <밀양(감독 이창동)>은 반기독교적 메시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영화는 비틀린 시각으로 한국 기독교의 모순적인 실상을 신랄하게 폭로한다. 기독교인들은 이 영화의 시각과 의도에 동의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 영화가 폭로하는 기독교의 실상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주인공은 유괴당한 아들의 죽음이 주는 상처를 신앙으로 극복하고자 했지만, 살인범이 당당하게 신앙과 용서를 주장하는 데서 말할 수 없는 모순과 분노를 느끼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독교의 모순에 저항한다. 여주인공이 기독교 신앙에 회의를 느끼게 된 것은 살인자가 신봉한 왜곡된 ‘회개’와 ‘용서’가 그 원인이다. 비기독교인들의 시각에서 바라본 한국교회의 ‘회개’와 ‘용서’는 관용적 태도로도 용납할 수 없는 불합리와 부조리의 근원이다. 한국교회의 부패와 몰락의 근저에 변질된 ‘회개’와 ‘용서’가 자리잡고 있음을 <밀양>은 선명하게 포착하고 있다. 한국교회에 만연된 ‘회개’는 성경이 말하는 회개와는 전혀 다른 별종의 발명품이다. 기독교의 정신과 동떨어진 회개, 진정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가로막는 회개는 기독교를 멸망으로 이끄는 암적인 요소이다. 기독교는 지금 반기독교적 사회에 대한 자기변론과 방어에 몰두할 때가 아니라, 신속하게 치명적인 환부를 도려내고 치료와 회복에 전념할 때이다.

참된 회개

한국교회의 회복과 부흥을 위한 첫걸음은 무엇보다 극단적으로 왜곡된 회개라는 뿌리를 제거하고, 성경이 말하는 참된 회개를 이식하는 것이다. 참된 회개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죄에서 돌이킴, 즉 죄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회개는 인간의 내면과 외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죄와 악으로부터 철저히 돌이키는 것을 뜻한다. 내면에 초점을 맞출 때 흔히 회개를 감정적인 것으로 오해한다. 잘못과 죄에 대해 감정적으로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후회하는 것을 회개로 생각하기 쉽다. 내면적인 회개에 감정적인 차원이 있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내면적 회개의 본질은 ‘죄에 대한 증오, 미움, 그리고 죄에 대한 저항과 투쟁’이다. 죄악과의 내면적 투쟁을 소홀히 하고 외면적인 변화에만 몰두할 때 회개는 바리새주의와 율법주의의 공격에 무기력하게 무너진다. 그 결과 죄와의 단절과 투쟁을 뜻하는 회개가 종교적인 형식과 관습으로 대체된다. 사람들은 교회가 요구하는 종교적인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면 회개한 것이고 죄 용서를 받았다고 착각하게 된다. 마치 중세교회가 고행성사에 의존해 참된 회개를 상실한 것과 같다. 죄와의 투쟁이라는 내면적 회개를 회복할 때, 타락한 인간 본성의 죽음과 죄와의 실제적인 단절이 시작된다. 이 투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케 된다. 또한 참된 회개는 자기 의를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의 죄인됨을 철저하게 인정하는 진정한 겸손으로 인도한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감, 즉 하나님을 갈망하고 바라는 것이다. 참된 회개는 예배, 경건, 기도, 봉사, 헌금, 구제 등 그 어떤 종교적 행위로 대체될 수 없다. 왜냐하면 참된 회개는 근원적으로 인간 본성과 성품의 변화를 뜻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본성과 성품의 변화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표현했고, 성령의 열매들로 묘사했다. 인간 본성과 성품의 변화는 삶의 목적과 방향의 변화, 그리고 구체적인 삶의 변화로 이어진다. 참된 회개로 말미암은 본성의 변화가 삶의 구체적인 변화를 유도한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그러나 단기간에 달콤한 열매와 보상을 바라는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눈에 드러나지 않는 죄와 타락한 본성과의 지루하고 비생산적(?)인 투쟁은 무가치한 것으로 쉽게 매도당하고 있다.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단번에 해결되고 용서받았다는 메시지에 모두가 열광하고 있다. 이런 믿음을 가진 기독교인들에게 매일 범하게 되는 죄에 대한 회개는 사실상 무용하다. 그들은 이미 용서받은 죄를 회개할 이유가 없다고 믿는다. <밀양>의 살인범이 뻔뻔하게 회개와 용서를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구원파적 회개를 맹신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이 진리라면, 고린도교회의 회개를 촉구한 바울의 메시지가 거짓이 되고, 에베소교회와 버가모교회와 두아디라교회와 사데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의 회개를 촉구한 요한계시록은 비진리가 된다. 한국교회를 좀먹고 있는 구원파적 회개를 제거하지 않고는 참된 회개의 회복은 불가능하다.

하나님 나라 DNA의 회복

참된 회개의 본질은 인간 본성과 성품의 변화이다. 죄악과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 본성이 죄악과 세상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갈망하고 사랑하고 닮아가는 새로운 본성으로 변화된다는 것이 성경적 회개의 핵심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즉 인간의 본성 속에 하나님 나라 DNA가 회복됨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팔복에서 하나님 나라 DNA를 회복한 천국백성의 모습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회개한 천국 백성의 첫번째 특징은 가난한 심령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생계를 전적으로 구걸에 의존하는 거지처럼, 회개한 사람은 자신 속에서 어떤 가능성과 능력과 선함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고 믿는다. 반대로 스스로의 능력과 가능성과 선함과 의로움을 믿는 사람은 참된 회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다. 참된 회개의 두번째 특징은 ‘죄에 대한 애통함’이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죄책감을 감정적으로 해소하는 것에 머무는 가짜 회개를 지양하고, 죄의 심각성과 위험성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죄의 위협에 무기력한 자신의 연약함을 애통해 한다. 죄에 대한 무감각과 무지,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자만과 자긍심으로 치장한 사람은 참된 회개와는 전혀 무관하다. 참된 회개의 세번째 특징은 ‘온유함’이다. ‘온유함’은 온유한 성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회개라는 문맥에서 ‘온유함’은 ‘심령의 가난함이 철저하게 내면화되고 습관화됨’을 의미한다. 온유함은 문자적으로 굽신거리며 구걸하는 거지의 본성을 뜻한다. 즉, 영생을 위해, 일용할 영의 양식을 얻기 위해, 죄 용서를 얻기 위해 날마다 하나님께 굽신거리고 구걸하는 것을 말한다. 진정으로 회개한 자는 죄 용서를 받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고 기꺼이 대가를 지불한다. 참된 회개의 네번째 특징은 ‘의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회개를 경험한 자는 죄의 단절에 만족하지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하나님의 의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몸부림친다. 의에 대한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인생을 걸고 삶을 내던진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이다. 스스로의 부패함과 타락함을 인식하고 철저히 하나님만을 바라는 사람, 자신의 죄와 악을 애통해 하는 사람, 하나님을 바라고 찾는 것이 일상화되고 내면화된 사람, 죄와의 단절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이다.

참된 회개와 용서의 실천

바울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행 26:20)는 문장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요약한다. 죄와 단절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내면적 회개를 경험한 사람은‘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는 데 전력을 경주해야 한다. 참된 회개는 내면적 차원, 즉 하나님과의 수직적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대인관계와 대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죄로 말미암아 파괴되고 어그러진 대인관계와 대 사회적 차원의 손상을 회복하고 개선하는 것이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는 것이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가해자는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피해자에게 잘못과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 그리고 피해를 보상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잘못하고도 죄를 시인하지 않는 기독교인, 부정과 부패와 치부를 가리고 합리화하기에 바쁜 교회, 뻔뻔한 태도로 죄를 부인하기에 바쁜 목회자의 삼위일체가 기독교를 망가뜨리고 있다. 참된 회개를 모르는 기독교와 교회에 소망은 없다. 참된 회개 없이는 참된 용서도 없다. 참된 회개 없이는 참된 구원도 없다. 참된 회개 없이는 참된 기독교의 회복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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