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호흡기 계통이 건강하지 못해서 자주 감기에 걸렸습니다. 결혼을 하고 혼수를 구입하면서 가장 먼저 장만한 것이 가습기였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감기를 다 막을 수는 없었지만 하얀 수증기가 나오는 것만 봐도 무엇인가 건강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어느 날 TV에서 광고하기를, 가습기에 보관된 물이 따뜻해지면 박테리아가 살게 되고 오히려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한참 문제가 되고 있는 옥시에서 만든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습니다. 1994년에 결혼했으니까, 1998년 미국으로 오기 전까지 4년간 사용했습니다. 미국에 와서 보니 가습기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 살균제까지 사용하는 가정은 없었습니다. 저희도 그렇게 살균제 없이 가습기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옥시와 몇 회사에서 만든 가습기 살균제가 문제가 되었을 때 적잖게 놀랐습니다. '어?  나도 저 제품 사용했는데...' 그리고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다행히 미국에 온 후 그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하지 않는 상태에서 임신하고 출산하고 양육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습기 살균제가 태아와 아이들에게 미치는 치명적인 영향과 그 결과들을 보면서 한편으로 안타깝고 다른 한편으로 분노하게 됩니다.

이번 사건은 한국 사회와 전문 지식인들이 건강하고 양심적인 소양을 갖추었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습니다. 살균제의 성분에 대해 검사하고 회사측에 유리한 보고서를 작성한 서울대와 호서대의 두 교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 분야에서 한국에서 가장 앞서가는 분들이라 했습니다. 연구 검토하고 보고서를 제출하는 데 수억 원의 연구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실과 다른, 검사를 의뢰했던 회사에 유리한 보고서를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수백 명의 아이들이 생명을 잃고 수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노출되었습니다.

인류가 축적하고 공유하고 있는 다양한 지식은 보편적 인류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인류 가운데 누군가가 그 중에서 보다 특별하고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더욱 그리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판단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지식이 전문적이면서 사회적 책임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전문적 지식은 가지고 있지만 지식에 맞는 사회적, 역사적 책임의식이 없는 학자들의 악행이 불특정한 다수를 향해 행해졌습니다. 그런 지식인을 양성하고 그를 성장시킨 사회가 그의 악행의 결과를 함께 책임져야 합니다. 참으로 불행하고 슬픈 일입니다.

한편 자신이 가진 지식과 사회적 위치에 대해 정확한 책임의식을 가진 빛나는 몇 사람이 있었습니다.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 호흡기알레르기과 교수로 제직하고 있는 홍수종 교수와 연구팀은 2006년부터 원인 미상의 폐질환으로 입원하는 소아, 영유아 환자에 주목했습니다. 그들의 병리적인 현상을 면밀히 분석했습니다. 홍수종 교수는 "우리 주변에서 수백 수천의 화학물질이 적절한 통제 없이 사용되고 있고, 실제 다양한 방법으로 아이들에게 노출되고 있는데 향후 이들에 대한 인체 유해성 문제의 검증과 통제 방법, 규제 원칙 등 법과 제도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한 정부의 노력도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와 연구팀은 감기처럼 특이 증상없이 시작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폐가 딱딱하게 굳는 폐 섬유화가 급격하게 진행돼 심한 호흡 곤란을 일으킨 환자들을 자꾸 접하면서 이런 증상을 가진 환자들에 대한 정보를 전국에 있는 호흡기 전문의사들과 공유했고, 이후 이상 증상을 추적하여 결국 산모·영유아 사망과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관련성을 입증한 논문을 세계 학회지에 실었습니다.(국민일보 2016년 5월 7일 보도) 한국 사회가 늦게나마 가습기 살균제 사용으로 인한 사망과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가진 전문 지식의 가치와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사용한 소수의 의인들에 의해서였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진 전문 지식인이 또 한 사람 있습니다. 1957년, 독일의 그뤼넨탈 제약사가 개발한 진통제 탈리도마이드는 임신부의 입덧을 덜어주는 진정효과가 있었습니다. 유럽과 일본 등 40여 개국에서 인기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선 판매되지 못했습니다. 미국 식품의약청(FDA)에서 신약 허가 업무를 맡은 새내기 공무원 프랜시스 켈시 박사가 그 약품의 독성 실험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며 허가 신청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까다롭고 비합리적인 공무원이라는 비난 앞에서 켈리 박사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 후 유럽과 일본에서는 1만 2천 명이 넘는 기형아가 태어났습니다. 탈리도마이드를 임산부가 복용했을 때 태아가 팔과 다리를 잃을 수도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한겨레 신문 2016년 5월 3일 보도)

지식을 개인화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지위를 사용하는 것은 참으로 악합니다. 사람을 상하게 하고 자신의 인생을 무가치하게 만듭니다.  비극적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 사회가 소수의 사람들에게 허락한 지식과 지위가 건강한 양심과 책임의식을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허락하셨고 인류가 축적하고 나누고 있는 지식은 선한 양심과 책임의식과 함께할 때 가치가 있습니다. 가치가 회복되고 양심이 칭찬받는 사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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