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의 주체로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인정의 문제 2

둘째, 인간인 우리가 다한다는 관점

이것은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첫 번째 관점과는 정반대의 믿음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이후에는 모든 것을 내버려두셨다는, 아주 편안한 믿음이다. 토마스 그린은 이런 관점을 ‘시계제조공과 시계의 관계’로 봤다. 시계(물건)는 한 번 사면 쓰는 자들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애프터서비스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이해하기 힘든 관점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인간을 만들어 세상에 보낸 하나님은 인간들이 무엇을 하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방임적인 하나님이 되신다. 하나님은 세상에 대한 신탁권리를 인간들에게 부여하셨고, 인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유전적으로 받은 지성과 영성과 모든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대신 통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고의 중심에는 우리의 자아가 단단히 자리잡고 있다. 뭐를 하든 더 이상 하나님을 탓할 필요도 없고, 감사할 필요도 없다. 왜? 모든 결정과 분별은 우리 인간들이 한 것으로, 잘해도, 못해도 우리 인간들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들의 분별의 여정에 하나님이 괜히 ‘끼어들’ 이유도 없고 그럴 여지도 없다. ‘우리가 누구라고?’ 하나님의 역할은 태초에 세상을 만드신 이후로 공소시효가 다했다. 그에 대해서는 역사책이나 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독일 전쟁광 히틀러가 유대인을 6백만 명이나 처참하게 살육했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고, 94년 르완다 학살에서도 잠잠하지 않았던가? 어디에 하나님이 계시는가? 결정하고 분별하는 것은 이제 오롯이 우리 인간들의 문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기적 유전자』로 유명한 리차드 도킨스를 비롯한 많은 진화생물학자들이 ‘하나님은 없다’라는 명제를 공고히 하는 데 공헌하고 있는 관점이 바로 이것이다. 이보다 더 일찍 세상에 알려진 20세기 대표적인 실존주의 사상가인 사르트르는, ‘하나님의 영향력을 인간의 삶에서 줄여나갈 때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고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다’ 라고까지 말했다. 인본주의에 근간을 두고 있는 ‘하나님에게서 자유로워지던가’ 아니면 ‘하나님 자체를 부정해 버리던가,’ 이 둘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는 빌미는, 하나님은 더 이상 인간사에 개입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 봐라, 너희 꼴이 이게 뭐냐?’ ‘너희 하나님은 뭐 하시는 분인지 보여 봐, 증명해 봐!’

인간사에 관심이 없으신 하나님, 아니면 더 이상 활동하시지 않는 하나님. 인간과 세상을 덩그러니 만들어놓고, 의붓아비처럼 나 몰라라 하고 떠나버린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이 이러하신가?

이런 관점에 천착한 인간들은 우리의 지성과 감성과 이성으로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최고의 심리학적, 경영학적 의사 결정 기법들을 개발해야만 했다. 그래서 최근에는 신경과학이 등장했고, 인지과학이 발달했고, 의사결정 기법의 달인들이 등장했다. 전문가마다 나름대로의 독특한 관점들을 주장했다. 자연주의 의사결정기법의 창시자인 게리 클라인은 『인튜이션『이라는 책을 통해 자연스러운 환경에서의 결정에는 직관이 가장 중요하고, 이런 직관은 전문성과 경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시대의 가장 통찰력 있는 경제학자로 칭송 받는 노리나 허츠는 『누가 내 생각을 움직이는가』라는 책을 통해 반대 의견을 표한다. 그녀는 ‘전문가들의 말은 믿을 수 없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문가들이 말하면 일반사람들은, 마치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처럼, 의사의 오진은 염두에 두지 않고, 머리에서 의사결정을 하는 부위의 스위치를 꺼놓는다는 것이다. 즉 전문가의 말을 함부로 믿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녀가 전문가를 곧이곧대로 믿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일례로,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1984년 직업군이 다른 네 그룹에게 10년 후 세계경제가 어떤 모습일지 예측해 보라고 했다. 10년 뒤 현실에 가장 근접하게 예측한 그룹은 어디였을까? 전직 재무부 장관들, 글로벌 기업 CEO들, 옥스퍼드대 학생들, 그리고 청소부들 중에서 청소부들의 답이 가장 근접했다는 것이다.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리처드 레저러스는 그의 책『감정과 이성』에서 그 동안 이성적인 판단의 세계를 통해 무시되어왔던 여러 가지 ‘감정’을 부활시켜 인간사의 모든 문제들을 되돌아보게 했다. 감정이 분별의 단초를 제공해 준다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이야기다.

동시대의 베스트셀러 작가 말콤 글래드웰은 그의 책 『블링크』를 통해, 전문가는 척 보기만 해도 안다는 것이다. 눈만 한 번 블링크, 즉 깜빡하면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의 진위를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가 제안한 비결은, 어떤 일에 최소 1만 시간을 투자해서 노력하고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후 말콤 글래드웰의 검증되지 않은 1만 시간의 신화에 감동받은 전세계의 수많은 비전문가들이 그 1만 시간을 채우기 위해 비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영학계의 대부인 피터 드러커는 그의 책 『프로페셔널의 조건』에서, ‘효과적인 사람들은 한 번에 지나치게 많은 의사 결정을 하려고 하지 않고,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는 데에 집중한다’고 말한다.

드러커의 주장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에게 업무를 분담해 어려운 일은 모세에게 가져오고 작은 일들은 백성의 대표들로 하여금 재판하게 했다(출애굽기 18장)는 역사적인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크리스천이기도 했던 그는 많은 기업에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경영의 진정한 한 수를 가르쳐 주었다. 문제는 그 기업들이 그의 말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 내 의사결정 분야의 최고 전문가 중의 한 명이며 『생각을 경영하라: 어떻게 똑똑한 결정을 내릴 것인가』의 저자인 민재형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올바른 의사 결정을 위해서는 의사 결정의 행태적 접근 방식과 체계적 접근 방식이 통합돼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의사결정은 기술(art)과 과학(science)의 합성체로 인식돼야 하며, 어느 한쪽에 치우친다면 절름발이 의사 결정이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이런 온갖 인본주의적이고 인지행동적인 저술과 이론의 근간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고 똑똑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문가가 되어야 하고, 직관을 개발해야 하고, 그렇다고 분석적인 의사 결정을 무시해선 안 되고, 감정과 행동을 이해해야 하며, 행동과 인식의 균형도 아울러 필요하다는 것이다. 니체의 말대로, 신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니, 혹여 살아있다 하더라도 물어볼 필요가 없고 우리들이 알아서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잘 분별하고 잘 결정했나? 수많은 의사결정의 기법들이 줄지어 개발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불확실하고 불안전한 시대에 살고 있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삼중의 어둠 속에 갇혀 있다. 그 어떤 경제 학자도, 인지심리학자나 미래학자도 과거와 현재를 분별하고 예측할 수 없었다. 노리나 허츠가 소개한 대로, 정답을 맞춘 그룹은 청소부들이었다. 인간은 스스로 똑똑한 체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것 아닌가?(롬 1:22)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는 이사야 55:9말씀은 과연 누구를 위한 말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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