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s on Spirituality 49 “기다림의 영성 3”

 “기다림의 영성”에 대해서 묵상하는 세 번째 시간, 오늘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함께 묵상합니다. 우리의 기다림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기다림은 사랑입니다. 지난 두 번의 글을 통해 기다림의 의미를 믿음과 소망으로 묵상하였습니다. 오늘 마지막 의미까지 합하면 결국 기다림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어우러진 것입니다(고전 13:13).

함께 기다림

기다림은 외롭고 고독한 시간입니다. 믿음으로 기다리고, 소망 가운데 기다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림 속에 경험하는 고독감과 쓸쓸함, 불안은 우리를 많이 힘들게 만듭니다. 이 기다림의 고독과 불안을 넘어서는 방법은 함께 기다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에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여인은 모두 아기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는 여인들입니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갖게 될 것이라는 소식은 깜짝 놀랄 만한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처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될 것이라는 말은 분명히 은혜의 소식이기는 하지만, 처녀인 마리아가 감당하기에는 사실 벅찬 소식이기도 합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들의 정죄를 받는 힘든 일이겠습니까? 마리아에게는 이 기다림이 불안과 고통의 시간이 될 것임에 분명합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소식을 들은 후에 곧바로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친척이었던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아서 아이를 낳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어서 세례 요한을 낳게 될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듣고, 임신한 지 이미 6개월이 된 상태였습니다. 마리아는 이런 엘리사벳을 찾아가 석 달을 함께 머무릅니다. 지금 임신한 두 여인이 함께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두 여인이 함께 기다리는 “기다림의 공동체”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것이 참 중요합니다. 마리아가 자신에게 찾아온 처녀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낯선 은혜를 감당할 수 있는 방법은 함께 기다림입니다. 마리아가 기다림의 시간에 경험할 불안과 고독을 넘어서는 방법 또한 함께 기다림입니다.

공동체의 축복

기다림은 함께할 때 가능해집니다. 기다림은 분명 외롭고 힘든 길이지만, 이 기다림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공동체로 함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림을 함께할 수 있는 공동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큰 축복입니다. 20세기의 천재적인 신학자로 알려진 본회퍼의 책 가운데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사랑받는 책은 『신도의 공동생활』입니다. 이 책은 본회퍼가 독일의 한 신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한 2년 동안의 공동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책입니다. 여기에서 본회퍼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심겨진 하나님나라의 씨앗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들 각자는 하나님이 세상 속에 흩어서 뿌려 놓으신 씨앗들입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각자 세상에 흩어져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할 운명인 우리들에게 함께 모일 수 있는 공동체가 주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이라고 본회퍼는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기쁨을 경험하고,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세워 주는 은혜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공동체에 속해 본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공감합니다. 우리는 때로 믿음의 공동체가 없이 신앙생활을 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의 공동체에서 상처를 경험해서 공동체에 대한 회의를 겪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잠시 교회에 출석하지 않을 때 우리는 “가나안교회”를 다닌다고 농담처럼 말합니다. 가나안교회를 거꾸로 읽으면 “안나가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상처받고, ‘교회가 뭐 이런가?’ 실망을 하면, 우리는 교회 공동체를 떠나기도 합니다. 때로는 ‘교회가 무슨 소용인가, 나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하면 되지’ 하면서 홀로 신앙생활을 하는 길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러한 길을 선택하는 신앙인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신앙이 자라지 않습니다. 때로 상처입고 때로 부대껴 아프기도 하지만, 교회에서 함께 예배하고, 봉사하고, 사랑하면서 내가 다듬어지고, 나의 신앙이 자라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교회에서 우리의 신앙이 자라는 이유는 교회가 하나님이 이 땅에 허락하신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 하겠다”(마 18:20)고 말씀하신 대로, 주님의 임재가 약속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홀로 외롭고 힘들 때, 주님의 임재와 사랑을 느끼도록 도와 주는 축복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본회퍼의 이 말을 한 번 들어보십시오. “내 마음의 그리스도는 때로 약하지만, 내 옆의 형제 자매의 입에 계신 그리스도는 강하다.” 때로 나의 마음에서 신앙이 약해지고 예수님의 임재가 점점 흐려질 때, 우리는 내 옆에서 함께 찬양하고 은혜의 말을 나누는 형제 자매를 통해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의 공동체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은 커다란 축복입니다. 믿음의 공동체에서 우리는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며, 이곳에 함께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기다림이 때로 외롭고 고통스럽지만, 믿음의 공동체에서 함께 기다리며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공동체에서 함께 기다림은 모든 기다림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축복하는 공동체

엘리사벳을 찾아간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서 큰 격려와 축복의 말을 듣습니다.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눅 1:41-42).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향해 축복의 말을 해주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어쩌면 축복 대신에 정죄의 말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엘리사벳은 결혼한 사람이고, 마리아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은 결혼의 테두리 안에서 임신하는 정당한 축복을 받은 사람이고, 마리아는 결혼의 테두리 밖에서스캔들을 일으킨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판단하는 눈길로 바라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정죄의 눈길로 바라보지 않고 축복의 말로 다가갑니다.

엘리사벳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엘리사벳이 성령 충만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에 공동체에서 이러한 축복과 사랑이 가능해집니다.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힐 때, 공동체에는 정죄와 판단 대신에 축복과 격려의 말이 가득하게 됩니다. 두 번째로 엘리사벳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은혜를 경험했던 사람이었기에 이러한 축복이 가능합니다.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아 아이를 갖는 것을 포기했던 사람인데, 그런 자신에게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함을 경험하였습니다. 엘리사벳은 자신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은혜가 마리아에게도 임하였음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이런 곳입니다. 믿음의 공동체에서 정죄와 판단의 말을 넘어서서 축복과 격려의 말을 나눌 수 있는 것은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의 경험 때문이고,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힘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충만하게 나타날 때, 그 공동체는 사랑의 공동체로 세워집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바로 이 사랑 가운데 가능해집니다. 사랑의 공동체에서 함께 기다릴 때에 우리는 기다림 가운데 경험하는 모든 고독과 불안을 넘어서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공동체를 세워 주는 힘이고, 사랑은 기다림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사랑 가운데 서로 격려하고 축복하는 공동체 속에서 우리의 힘든 기다림은 가능하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의 공동체는 축복과 사랑이 넘치는 기다림의 공동체로 세워져야 합니다.

기다림의 영성을 실천하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 더딜지라도 기다리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이 현재의 삶에 심겨져서 자라고 있다는 소망 가운데에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 가운데 기다리십시오. 기다림의 힘든 시간을 격려와 축복으로 함께 하는 공동체 안에서 사랑 가운데 기다리십시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기다림 속에서 주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축복을 경험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