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2).

참 자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는 천재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물리치고 항상 일등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가 행복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에 대한 주변의 기대가 커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등 자리를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가장 좋은 학교들을 나왔고 마침내 최고의 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이른 나이에 모교의 교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는 최고의 신랑감이었습니다. 그는 미모가 출중하고 지성을 겸비하고 집안까지 훌륭한 아내를 얻었습니다. 아내와의 사이에서 잘 생기고 머리 좋은 아이들이 태어났습니다. 가정은 화목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자살을 하였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그는 항상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살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언젠가부터 그는 그런 자신에 대해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세상의 요구와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는 동안 정작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준 허상일 뿐 자기 자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제라도 자신을 찾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본래의 자신의 모습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행하고 싶었던 그가 찾은 유일한 방법은 자살이었습니다. 황당한 이야기처럼 들리는 이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자살을 통해 그가 죽인 것은 그의 참된 자아가 아니라 거짓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자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자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들은 두세 살 무렵, 무엇을 선택하기도 전에 '나'라는 말을 줄곧 써왔기에, 이렇게 주어진 '나' 위에 삶의 토대를 세우게 된다. 언제나 이런 유아적 '자아'를 중심으로 때로는 요구하고, 때로는 그것을 지키려고 열렬히 저항하기도 한다. 이런 자아는 그들이 만든 것도 아니지만 그들의 성장을 가로막고 진정한 인격 형성에 장애가 된다. 이런 사물로서의 자아를 완전히 융해하여 재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죽음을 넘어서서 부활에 이르게 하는 변화를 완수할 수 있다"(젱델, 『침묵에』 93)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형성된 '나'라는 '존재를 따라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참된 신앙생활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된 신앙생활이란 자신의 참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예수님께서 버리라고 말씀하시고 부인하라고 말씀하신 '자기'는 바로 이 거짓 자아인 유아적 자아입니다. 젱델의 말처럼 이 거짓 자아를 완전히 융해하여 재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죽음을 넘어서서 부활에 이르게 하는 변화를 완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우리가 기독교에 속했다거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을 한다고 참 신앙인이 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떠받드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헛된 자아를 없애고 참 자아를 찾는 데 힘을 쓰는 참된 신앙의 태도를 갖추었는지의 문제입니다. 옛 자아를 벗어버린 참 사랑을 터득하고, 실천하고, 가르치는 사람만이 참 자아를 찾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유의 길을 걷는 참 신앙인일 것입니다. 그 과정을 사도 바울은 "변화를 받아"라고 말합니다.

독특한 인격체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각각 독특한 인격체로 만드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각각의 공동체에도 고유한 정체성을 주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를 채우실 때 우리는 본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됩니다.

우리들 각자가 하나님의 무한한 돌보심을 통해 고유한 존재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은 자존감을 높여줍니다.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일란성 쌍둥이도 똑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그 누구와도 똑같지 않은 유일한 존재이며 독특한 인격체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함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 139:14).

인간의 존엄성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우리 모두 그런 존엄성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본문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대로 각자의 고유한 모양대로 변화할 것을 권합니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는 명령형, 현재형, 수동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 혹은 공동체로 지속적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행하시는 행동이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변화시켜 나가시는 과정 중에 있는 존재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인내를 가지고 서로를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작업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서로에 대해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들 개개인을 변화시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변화시켜 나가고 계십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인내심뿐 아니라 기대감을 가지고 서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공동체 안에서는 서로에 대해 완벽함, 효율, 업적이나 성과와 같은 세상적인 기대를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과 삶이 성장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본래 되기로 한 존재로 되어 가는 과정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고유한 계획을 거스르는 틀 속으로 우리를 끼워 넣도록 허용할 때, 성장을 위한 우리의 지속적인 변화의 과정은 유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선택의 자유는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고유한 존재로 살아갈 수도 있고, 이 세대를 본받아 하나님께서 의도하지 않은 모습대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성공을 추구하면서 이 사회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갈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면서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신 우리의 모습대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은 순응을 강요합니다. 효율성을 위해 각자가 일정 기능을 담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사와 권세는 경제와 정치구조를 통해 그들의 존재를 드러내며 우리에게 자신들의 규칙을 따를 것을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백성으로서 그러한 권세에 맞서 복음에 내포된 의미를 삶으로 살아낼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자유케 하여 우리 삶의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혁명적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하지만 참된 자신이 되는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진정한 자신이 되어 온전한 자유를 누리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그 자유를 잃어버리면 우리를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물질만능주의로 치닫고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인 교회가 성령 공동체가 되기를 꿈꾸어야 합니다. 교회의 존재만으로 세상이 모든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이 모든 것이시라는 강력한 선언이며, 2000년 전 초대교회를 탄생시켰던 주님의 영은 오늘도 변함없이 활동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공동체, 그것은 성령에 이끌리게 된 사람들이 마땅히 이루게 될 수밖에 없는 새로운 삶의 양식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누릴 기쁨에 대해 가지고 계신 뜻입니다. 우리는 성령 공동체가 주는 격려와 지지를 통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으키시는 변화를 통해, 자유롭고 창조적이며 참되고 진실된 본연의 모습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용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가져야 할 것은 용기입니다.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겁먹게 만듭니다.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회피하도록 만듭니다. 문화적 기대라는 잣대를 들이댐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는 잘 살 수 없다고 우리를 좌절시키고, 우리 각자가 창조된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거기에서 생겨나는 불만족과 두려움은 영혼의 타락을 초래합니다.

일례로 '얼짱' '몸짱' '일류'가 되어야 한다는 세상의 유혹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실제의 모습을 폄하하고, 그 모습으로는 절대로 남들과 경쟁하여 이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정받을 수 없다는 강박관념을 불러 일으켜, 끝없이 무언가에 집착하고 중독되게 만듭니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허황된 것들을 쫓아다니며 인생을 허비하게 만들어 영혼을 질식시키는 것입니다.

"위대한 신화를 보면 남이 갔던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번번이 길을 잃는다. 영웅은 낡은 세상과 낡은 길을 버리고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지도도 없고 뚜렷한 발자취도 없는 미지의 어둠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남의 괴물과 싸울 것이 아니라 자기의 괴물과 싸우고 자기의 미궁을 탐색하고 자기의 시련을 감내해야만 자기 삶에서 빠져 있었던 것을 찾아낼 수 있다. 이렇게 거듭나야 자기가 두고 온 세상에도 무언가 쓸모 있는 것을 안겨줄 수 있다. 그런데 말을 탄 기사가 이미 잘 닦인 길로만 다닌다면 그것은 남들의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지 모험이라 할 수 없다. 『성배를 찾아서』라는 프랑스의 오래된 문헌을 보면 성배를 찾으려는 사람은 '스스로 점찍은 곳, 가장 어둡고 길도 나 있지 않은 곳'으로 해서 숲으로 들어가야 한다. 성배 전설에 나오는 황무지는 사람들이 사회의 인습만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남들이 기대하는 행동만 하면서 진정성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는 곳이다."(카렌 암스트롱)

그리스도인은 황무지를 벗어나 어둡고 길도 나있지 않은 숲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자유를 선사합니다. 하지만 자유는 용기라는 열쇠가 있어야 열립니다. 참 자아를 찾는 데 필요한 것은 굳건한 용기입니다. 복음의 삶을 위해 세상의 방식과 다르게 살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 그 사람만이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힘을 통해 이루시는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변화

"변화를 받아"와 동일한 단어나 관련 단어들로 새롭게 변화되는 일을 묘사하고 있는 바울 서신의 다른 구절들을 통해 이 말씀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골로새서 3:10은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원리에 입각해 영적으로 새로워짐으로 자신의 참 자아를 발견하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각자 알아서 살라'는 세상의 주장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새롭게 함"이라는 단어는 디도서 3:5에도 등장합니다.("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즉 세례를 통해 이루어진 '칭의'는 성령의 지속적인 성화를 통해 삶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4:16절에서 유사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는 매순간 똑같은 모양의 틀에 박혀 살 필요가 없습니다.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와 같은 모습일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놀라운 자유의 모험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사 43:19).

속사람의 변화를 느낄 수 없는 경우도 많고 영원히 알 수 없는 영적인 변화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게 변화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자신에 대해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에게 부어진 생명의 역사는 우리를 변화시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

하나님의 변화 사역은 의식적 사고의 중심지인 '마음'(minds)을 새롭게 함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개인의 경건 시간과 그룹 성경공부나 묵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줍니다. 성경에 강조된 하나님의 목적과 원리들을 추구하는 데 마음뿐만 아니라 지성을 함께 사용한다면, 자신과 공동체가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뜨겁게 기도하며 성경 말씀과 일상의 경험들을 깊이 묵상할 때,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게 되며 자신의 참 모습을 더욱 더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판단하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들이 큰 위기를 맞는 것입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것이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정의에 합당한지 분변하며 살아야 합니다.

말씀으로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우리의 정체됨, 안일함, 교만은 산산이 부서져야 합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삶은 생각하고 또 생각할 때 가능합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할 때에라야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게 될 뿐 아니라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신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며 무한한 자기 사랑을 가진 분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지적으로 파고든다 해도 그분의 말씀은 언제나 참된 것으로 판명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은 언제나 우리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아름다운 선물 가운데 하나인 지성을 사용하여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을 탐구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기쁨 가운데 자신이 극적으로 변화되어 나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참 자아로의 변화입니다.

또한 그 변화는 반드시 사회적인 변화로 이어집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싫든 좋든 얽혀 들어가는 것,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 놀라고 응답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전체와의 관련성을 잃어버린 채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현대인들은 필연적으로 사람됨의 길을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참 자아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것을 누리고 있지만, 사람들이 여전히 목말라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우리가 절망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목적이 되지 않고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필요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을 때, 인간과 인간이 하나 되는 그 순간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 기쁨은 참 자아로 변화되어 가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참 자아로 변화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토록 주시기 원하는 기쁨을 이웃과 더불어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