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신뢰도 19.4%

우리는 특정인, 기업, 집단, 국가, 제품 등 다양한 대상에 대한 사회적 평판과 선호도 및 신뢰도를 심층적 여론조사를 통해 수치화하고 이를 분석하는 것이 보편화된 시대를 살고 있다. 미국 대선주자들의 선호도와 당선 가능성, 그리고 구체적인 이유를 분석하기 위한 각종 여론조사가 빈번하게 시행되고 있고, 각 캠프에서는 그 결과를 분석하고 대책을 마련한 후 이를 향후 행보에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한국교회에 대한 사회적 평판은 어떨까? 최근에 시행된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는 19.4%에 불과하다.(기독교윤리실천운동, 2013년) 최근 10년 사이에 진행된 4번의 동일한 여론조사에서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는 한번도 20%를 넘은 적이 없다. 한국교회에 대한 약간의 신뢰라도 있는 사람이 10명 중 2명이 안 된다는 말이다. 동일한 통계에 따르면 한국교회에 대한 불신지수는 44.6%에 달한다.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믿을 수 없는 집단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말이다.

한국교회가 전도와 교화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회적 구성원으로부터 신뢰할 수 없는 집단으로 낙인찍힌 지 오래라는 것을 이 통계들이 확증해 주고 있다. 기윤실은 이것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반등이나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만성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라고 진단하고 있다. 우리는 불신의 이유로 지목된 언행불일치와 부정부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기독교가 표방하는 메시지와 현실의 괴리, 복음과 삶의 괴리가 사회구성원들의 불신을 초래할 정도로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인의 눈에도 기독교는 그 정체성을 상실한 단체, 즉 복음을 잃어버린 종교집단에 불과하다.

네온사인으로 전락한 십자가

위 여론조사에 의하면 기독교와 기독교인은 언행불일치의 존재로 비쳐진다. 기독교가 표방하는 이미지와 메시지는 좋지만, 그 실상은 상반된다는 평가이다. 그러나 성경이라는 절대적인 프리즘을 통해 바라본 기독교의 실상은 훨씬 심각하다. 기독교의 본질은 십자가이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오로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다. 예수와 십자가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고 했고,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라고 함으로써, 십자가가 복음의 핵심이요 복음 그 자체임을 선언했다. 그리고 사복음서는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집중적으로 기술하면서,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사역의 완성이자 목표임을 단언했다. 그런데 현대교회에 이르러 성경이 증거하는 십자가가 왜곡되고 훼손되어 그 실체를 알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교회건물을 나타내는 붉은 네온사인으로, 마음의 위로를 주는 목걸이로, 종교적 유희의 대상으로, 성공과 번영과 부귀를 보장하는 부적으로 전락했다. 그렇다. 한국교회, 나아가 현대교회는 복음을 상실했고, 십자가를 잃어버렸다.

십자가는 상징이 아니다. 십자가는 껍데기나 장식이 아니라, 복음의 정수이자 실체이며 복음 그 자체이다. 십자가에 생명이 있고, 구원의 능력이 있다. 십자가는 기독교를 지탱하는 기둥이자, 힘의 근원이다. 십자가가 그 위상을 상실하면, 기독교는 모든 힘을 잃는다. 십자가가 장식이나 미신으로 전락하면, 교회는 그 정체성을 상실한다. 십자가가 종교적 유희와 세속적 가치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면, 세상은 기독교를 향해 조롱과 비난의 목소리를 높인다.

왜곡의 싸이클 : 왜곡, 축소, 화석화, 사멸

2천 년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기독교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의 복음이 일정한 사이클을 거치면서 쇠퇴와 사멸의 과정을 겪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첫번째 단계는 부흥의 시대이다. 부흥과 개혁, 그리고 대각성을 통해 십자가 복음의 능력이 기독교를 새롭게 하고 놀라운 생명력과 재생산력을 부여한다. 짧은 부흥의 시대가 지나면 곧바로 닥치는 것이 십자가 복음에 대한 왜곡 현상이다. 십자가에 대한 왜곡은 현실안주와 종교적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들에 의해 주도된다. 이들은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왜곡을 지속적으로 시도하여 항거불능의 아성을 구축한다. 그 결과 십자가의 복음은 번영과 축복의 세속적 복음으로 변질되고, 십자가의 복음을 추종하는 자들은 급진주의자 혹은 이상주의자로 매도된다.

왜곡된 복음이 대세로 정착하면 다음 단계로 십자가 복음에 대한 철저한 축소화가 전방위적으로 진행된다. 축소화가 진행됨에 따라 십자가의 복음은 더 이상 기독교의 본질이 아닌, 특수한 시기에 특별한 사람에게만 요구되는 선택사항으로 자리매김한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사람들은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획득한다. 십자가, 고난, 희생, 겸손, 낮아짐, 핍박 등의 가치는 외면당하고 번영, 성공, 부, 권력, 행복 등의 가치가 기독교의 이름으로 포장되어 널리 유통된다. 본격적으로 십자가와 복음은 문화화되고 상품화된다.

축소화의 다음 단계는 화석화이다. 점점 더 위축되어 생명력을 잃어가는 십자가 복음은 세대를 거칠수록 강력해지는 세속화와 교리화의 흐름을 따라 화석화된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입되는 변질된 복음에 십자가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는 창의력과 상상력을 상실한다. 복음이 화석화되는 시대에 진정한 십자가의 복음은 희귀한 존재가 된다. 기독교는 온갖 부정과 부패와 비리와 죄악의 온상으로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다.

그 결과 기독교는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에 놓여 사멸의 과정으로 접어든다. 한때 기독교가 번성하던 많은 지역, 많은 나라에서 더 이상 기독교를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없는 한 기독교는 해체되거나 사멸한다.

십자가 종교의 부활

한국교회는 어떤 단계에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을까? 십자가 복음의 메시지가 희귀해졌고, 기독교가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했으며, 기독교 교세가 급격하게 쇠락하고 있고, 차세대의 기독교 유입이 단절된 상황에 비추어볼 때, 한국교회는 화석화 말기와 사멸화 단계의 초기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20세기 초까지 번성하던 영국교회가 2차대전 이후에 급격하게 사멸화 과정을 거친 것처럼, 한국교회도 한 세대 안에 동일한 과정을 거칠 것이 명백하다. 미주한인교회들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더욱 혹독한 환경에 처해 있다. 어떤 미봉책도 빈사 상태의 기독교에 회생의 기회를 부여하지 못한다.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대안이 요구되는 때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가운데 부흥과 대각성의 물결이 기독교를 뒤엎지 않는 한, 기독교의 사멸은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보인다. 쓰나미에 휩쓸리기 직전의 기독교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 종교의 부활이다. 기독교의 근원이 십자가이기 때문에 이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십자가 복음의 비밀을 재발견하고,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고 선포하고 외치는 것이 이 시대의 의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역이다.

터(기독교)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시 11:3)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라는 불변의 터를 새롭게 닦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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