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의 주체로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인정의 문제 3

셋째, 성인 아들을 둔 아버지의 관점

이것은 토마스 그린 신부의 결론으로, 하나님은 마치 성인 아들을 둔 아버지와 같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 시작해 보자. 당시 팔레스타인 문화와 전통에선 받아들여줄 수 없는 둘째 자식의 무리한 요구, 즉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내놓으라는 것과 그의 장래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것을 미루어 짐작함에도 불구하고 너그러운 아버지는, 그 아들의 분깃대로 재산을 나눠 주고 본인 스스로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허락해 주었다.

이스라엘의 아버지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인간을 만드시고 아브라함을 통해 민족을 세워 번창하도록 축복하셨지만 이스라엘이라는 아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않았다. 목과 귀가 곧아 듣지 않았고 불평했고 타락했다. 때론 하나님도 후회하셨고, 징벌을 내리셨고, 파멸로 이끄셨다. 하지만 늘 이스라엘을 마음에 두시고, 염려하시고,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도우셨다. 하나님은 태초에 아브라함을 통해 한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지만 일일이 간섭하고 조정하지 않으셨고, 그렇다고 원하는 대로 알아서 살라고 방관하거나 무관심하지도 않으셨다. 이스라엘이 성장하고 성숙해서 마침내 성인이 되어 아버지의 뜻을 알아 스스로 행하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히브리 사람들이 고대하고 고대하던 천군천마를 이끌고 하늘에서부터 지상으로 불을 뿜고 진격하는 무소불위의 사령관, 해결사로서의 메시아로 오시지 않았다. 온 세상 사람들을 놀라 뒤로 넘어지게 하거나, 무릎 꿇게 하거나, 악인들을 진멸하거나, 사람들을 세상의 폭압과 노예 상태로부터 단번에 구출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 어느 인간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가장 낮은, 그리고 실패한 하나님의 모습으로 오셨고, 사셨고, 가셨다.

만약 우리들이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면, 그래서 그의 아들 예수가 제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울부짖었는데도 매정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이뤄’ 그를 죽게 내버려두신 분이라면, 2000년이 지난 오늘의 우리가 그를 하나님 아버지라 부를 일은 없을 것이다.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을 우리 역시 아버지라 부르고 그런 분의 자녀됨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지옥에서 천국까지 다시 들어올리셔서, 온 세상의 악의 권세를 물리치셨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그의 아들까지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시는 분.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지만, 무턱대고 강요하지 않으시고 앞장 서서 끌고 가지도 않으시며, 양들의 목자처럼 뒤에서 늑대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분. 우리가 원하지 않을 때 갑자기 나타나 엄청난 선물꾸러미로 우리의 환심을 사고 평상시에는 무관심한 그런 아빠와 같지 않은 분. 전능자로서 가장 힘세고 능력 있다는 것을 함부로 과시하지 않으시는 분.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 맘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지도 않으시는 분. 우리가 어떻게 살든 그분의 관심 밖이라고 말씀하시지 않는 분. 그분과 우리 사이에, 부모와 자식으로서 어느 정도의 긴장은 있을 수 있지만(춤을 잘 추려면 어느 정도의 긴장은 필요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이런 긴장이 삶의 부담이나 억압이나 통제로 보이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시는 분. 우리가 어리석은 분별과 판단과 결정을 내린다고 해도 결코 조급해하시지 않는 분. 늘 우리가 최선의 것을 선택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분.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분.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우리는 마침내 성인이 된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보자. 제자들은 무식했고, 용감했고, 질투심도 있고, 게을렀고, 잠이 많았다. 예수님이 따라오라고 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따라왔지만 정작 무엇을 할지도 몰랐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는지도 분별할 수 없었다. 그들이 아는 물리적인 메시아는 결코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분이 아니었다.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부활의 주로서 예수님은 꿈도 못 꿀 환상에 불과했다. 예수님은,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그들을 어린아이들로 여겨젖을 먹이시고 밥을 먹이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육신에 속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고전 3:1-3). 제자들은 시간이 흘러도 완벽하게 되지 않았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천국에서의 자리싸움을 했고(마 20:21; 막 10:37),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서 예수님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자 불로 저주하려 했고(눅 9:54),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항변하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라고 꾸짖음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이들의 주인으로만 남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종으로 시작한 제자들 역시 더 이상 하인으로 남지 않았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시기 전날,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기시면서 예수님은 참된 종의‘본’을 보이신다.(요 13:14-5) 그런 다음 15장 15절에서,“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3:34)고 말씀하신다. 더 이상 제자들은 예수의 종인 ‘둘로스’가 아니라 친구인‘필루스’로 승격된다.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종의 신분이 아닐 뿐더러,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을 필요도 없고(갈 4:2),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 받고, 하나님의 유업까지 이어받게 되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르게 된다.

우리가 분별의 여정을 시작할 때,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에서 보았듯이, 인격적이시고 모범적이신 아버지와, 주님과, 친구와 함께 한다는 것은 축복이고 영광이다. 이제는 더 이상 자녀들의 선택권을 인정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보호하고 엄격하게 다스리는 아버지나, 말만 생부지 양육이나 교육에 무관심한, 자녀들이 무엇을 어떻게 분별하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는 그런 아버지하고는 분별할 일이 없어졌다. 대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탄생과 삶과 죽음과 부활의 역사를 통해, 그리고 우리들의 참여와 헌신을 통해 성인으로 자라난 우리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고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신(요 3:16)’ 전인격적이신 아버지 하나님과 분별을 같이 한다. 그리고 헨리 나우엔의 사후에 출간된『분별력』에서 말했듯이, 단지 “나는 있다”고 선포하시기만 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돌보시고, 고치시고, 안내하시고, 지도하시고, 도전하시고, 때론 대립도 하시며, 우리 삶의 모든 장소와 시간과 순간들에 적극적으로 현존하시는 그런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분별을 한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비해 놓은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기 위해 분별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이루어질 것을 믿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분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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