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처럼 ‘죽는다’는 말을 자주 쓰는 민족이 또 있을까? 아파 죽겠다, 배고파 죽겠다, 배불러 죽겠다, 좋아 죽겠다, 미워 죽겠다, 더워 죽겠다, 얼어 죽겠다, 시원해 죽겠다, 바빠서 죽겠다, 심심해 죽겠다, 돈 없어 죽겠다.... 심지어 ‘행복에 겨워 죽을 지경’이란다.

말은 생각과 느낌의 표현이다. 그리고 또 말이 있어야 생각도 깊어지고 느낌의 표현도 싱싱해진다. 따라서 말을 연구하면 그 쓰는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 한국인들은 죽음에 대한 생각이 많고 깊은 셈이다. 그런데 죽음의 문제를 가장 심각하고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종교들이다. 성경에는 죽음과 연관된 단어들이 2천 개가 넘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 한국인들은 종교성이 강한 민족이라는 것이 입증된다.

그런데 죽음은 인간 최대의 문제이다. 인간은 누구나 살아 있는 동안 수많은 문제들과 격렬한 싸움을 하며 살아간다. 평생토록 별별 문제들과 전쟁을 해야 하는 숙명적 존재이다. 그런데 그것이 왜 내게 문제가 되는가? 한 번쯤은 조용히 앉아서 모든 문제의 근원들을 곰곰이 따져보아야 한다. 그래서 찾아낸 인생철학적 결론이 무엇인가. 바로 죽음이 모든 문제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항상 죽음의 공포와 비례한다. 죽음의 위험이 높을수록 문제가 더욱 더 심각해진다. 따라서 ‘만약 죽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인생의 파도는 높을수록 신명나게 된다. 명상적 신앙 과학자 파스칼의 명언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가장 큰 즐거움은 무엇보다도 그 죽음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데 있다. 신앙은 죽음에 대한 사망선고이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신앙인들은 누구나“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요 11:25-26)는 혈서보증서를 예수님으로부터 받는다.

여행을 떠나면 한국인들은‘좋아서 죽겠다’는 말을 한다. 비록 잠자리가 바뀌어 깜깜한 밤을 하얗게 밝히더라도 여행길은 언제나 행복을 가져다 준다. 하물며 죽음을 탈출해서 영원한 생명의 길로 들어선 여행인데 얼마나 좋겠는가. 너무 좋아서 빈손으로 훌훌 떠나게 된다. 심지어 하나밖에 없는 육신조차 이 땅에 남겨두고 떠나게 된다.

그것만이 아니다. 구원받은 순간부터 죽음의 공포와는 완전히 결별했다는 것을 똑똑히 깨달아야 한다. 하늘나라가 마음에 있고, 하늘나라가 가정에 있고, 하늘나라가 직장에 있고, 하늘나라가 바로 지금 예배 드리는 교회에 있다는 사실 말이다. 말하자면 죽음을 맞이하기 훨씬 전인 바로 지금, 현재, 그리고 이 땅 위에서 하늘나라를 여행하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한 번 더 물어본다. 당신은 지금 하늘나라를 향하여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마음 속 깊이 깨닫고 있는가. 그러한 여행의 기쁨 때문에 좋아서 죽을 지경인가. “그럼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신앙인들의 자신 있는 대답이다. 그렇다. ‘좋아 죽겠다’는 한국말은 그토록 값진 믿음의 언어임이 밝혀진 셈이다. 정말 죽는다는 것이 좋아 죽을 만큼 믿으면 한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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