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유일성

십자가는 독특하다. 이천 년 전 기독교의 상징이자 복음의 실체로 등장한 십자가는 인간의 상식을 깨뜨리는 강력한 충격이었다. 당대의 로마와 유대사회에서 십자가는 저주와 실패와 수치의 상징이었다. 십자가형은 극악한 범죄자나 반역자에게 내려지는 최고의 형벌이었다. 모두가 외면할 수밖에 없는 수치와 조롱과 멸시의 상징이 인류를 죄와 사망의 형벌에서 해방할 구원의 복음으로 제시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고 불합리해 보인다. 십자가에 못박힌 범죄자(?) 예수를 구세주와 온 세상의 통치자로 선포하는 복음이 광신자들의 헛소리로 비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해 보인다. 성공과 번영과 명예와 존중과 칭찬과 행복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사회에 실패와 가난과 수치와 멸시와 고난과 핍박과 의를 위한 죽음을 복음으로 선포하는 종교의 부흥은 꿈꿀 수 없는 기적이다.

그런데 항거불능의 인간의 본성과 편견의 벽을 깨뜨리고 300년에 걸친 로마제국의 핍박을 견디며, 십자가의 복음은 인류사회를 뒤흔드는 역사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십자가는 인간의 본성과 대치되기에 독특하다. 십자가는 인간이 사랑할 수 없고, 인간의 능력으로는 살아낼 수 없는 것이기에 독특하다. 그래서 십자가의 복음은 인간의 발명품일 수 없고, 하늘의 메시지일 수밖에 없다. 불합리하고 어리석은 십자가가 사람을 구원하고, 사회를 변화시키고, 역사와 문명을 움직이는 것은 십자가의 유일성을 확증하는 생생한 증거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성패는 전적으로 십자가의 유일성에 의존한다.

십자가는 그 어떤 인간의 가치와 노력과 제도와 조직과 문화와 종교와 철학과 이데올로기로 대체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인간적인 것들이 십자가를 대체하는 순간 기독교는 병들고 죽어간다. 따라서 십자가의 유일성을 이해하고 이 유일성을 구현해 내는 것은 성경적 기독교의 부활에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다. 교회다운 교회, 세상의 칭찬과 존중을 받는 기독교를 꿈꾼다면 십자가의 유일성을 회복하는 데 목숨을 걸어야 한다.

가치의 역전

십자가의 유일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체득한다는 말이다.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의 근본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십자가는 가치의 역전을 상징한다. 천국을 꿈꾸고, 영생과 구원을 소망하는 인간의 본성은 높은 것을 갈망하고 지향한다. 그런데 낮고 천한 십자가를 구원의 복음으로 제시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땅에 발을 디딘 인간의 본성을 반영하는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진정한 천국의 가치를 전 인류가 주목할 수밖에 없는 혁명적인 방식으로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십자가는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노력으로는 하늘(구원)에 다다를 수 없고, 오히려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천국의 힘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구원이 성취됨을 상징한다. 한 마디로 십자가는 가치의 역전 혹은 가치의 치환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하늘에 이르는 길로 생각하는 부귀와 성공과 명예와 지식과 칭찬과 권력 등이 사실상 인류를 멸망으로 이끄는 길이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하고 살아낸 가난과 실패와 고난과 멸시와 어리석음과 핍박과 비천함의 복음이 천국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십자가는 증언한다. 십자가는 세상에 통용되는 모든 가치를 심판하고, 세상에서 외면당하는 하찮은 가치들의 영원한 승리를 선언한다.

십자가는 이렇게 선언한다: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 기뻐하는 자가 아니라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강하고 담대한 자가 아니라 온유한 자가 천국을 상속한다. 배부른 자가 아니라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 받는 자가 아니라 주는 자가 복이 있다. 칭찬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핍박과 조롱을 당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 높은 곳을 지향하는 사람이 아니라 낮은 곳을 찾아가는 사람이 더 존귀하다. 세상의 가치를 천국의 가치로 치환하는 것이 십자가의 역할이다. 이 가치의 역전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놓치게 된다.

낮아짐

십자가의 구체적인 의미의 첫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낮아짐이다. 예수님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생애는 낮아짐을 추구하는 삶으로 특징지어진다(빌 2장 5-11절). 하나님의 아들은 황제나 왕이나 부귀한 자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고, 가난하고 비천한 여인의 몸을 빌어 태어났다. 그는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니라 천대와 멸시의 대상인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랐고, 이방인들의 땅 갈릴리를 사역의 중심지로 삼았다. 예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들 같은 힘있고 존중받는 의인이 아니라, 가난하고 비천하고 병든 자들과 멸시와 천대의 대상인 세리와 죄인들을 섬겼다. 예수는 영화로운 성공을 꿈꾸지 않고, 가장 낮은 곳을 찾아갔다. 그는 세리와 창기들의 친구가 되었고, 병든 자와 문둥병자와 장애인들을 치유했으며, 사마리아인들과 이방인들을 긍휼히 여겼다.

예수가 택한 죽음의 장소는 거룩한 성전이 아니라 죽음의 흔적들이 난무하는 골고다(해골의 곳) 언덕이었고, 죽음의 방식은 온갖 고난과 멸시와 수치의 대상인 십자가 처형이었다. 복음서가 증언하는 예수님의 삶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십자가는 단순한 구원 사건으로 축소되어선 안 된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삶 자체요, 낮은 곳(십자가 죽음)을 지향하는 삶의 여정이다. 사도행전 이후의 초대교회 역사가 분명하게 증언하는 것처럼, 초대교회는 철저하게 낮아짐을 추구하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냈다. 이 땅에서의 성공과 영화와 부귀를 추구한 자들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이 땅의 실패와 조롱과 멸시와 핍박과 가난과 죽음을 각오하고 십자가의 여정을 시작했다. 그 여정의 끝에 십자가 죽음이 놓여 있었다. 십자가는 어떤 이에게는 순교, 어떤 이에게는 가난과 질병, 어떤 이에게는 핍박과 환란, 어떤 이에게는 사회적 죽음, 어떤 이에게는 감옥, 어떤 이에게는 조롱과 멸시와 훼방으로 다가왔다. 낮아짐을 사랑하고 낮은 곳과 낮은 곳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는 삶, 즉 낮아짐을 추구하는 삶이 없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진정한 실체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다시 십자가 앞으로

예수의 신적인 권능에 환호하며 그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과 제자들은 정작 기대했던 화려한 왕의 대관식이 비참한 십자가 처형으로 돌변하자 모두 배반의 물결에 동참했다. 그들 중 절대다수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영원토록 외면했다. 그러나 다시 십자가 앞에 나아온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더이상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징표이자 거룩한 영광의 표지였다. 십자가는 실패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었고, 생명을 다해 일평생 살아내야 할 천국으로의 여정이자 최종관문이었다. 십자가 앞에 다시 선 제자들에게 세상의 길과 십자가의 길은 양립할 수 없는 갈림길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희생하고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선택했고, 기쁨으로 일평생 그 길을 완주했다. 그들은 세상의 근원적 가치와 원리를 배설물로 여기고 십자가의 도에 자신의 삶을 드렸다.

지금 우리의 모습, 현대교회의 모습은 어떤가? 십자가 복음을 외면하고 예수의 이름과 권능으로 행해지는 축복과 성공과 은총에 중독된 모습은 영원한 배도자들의 모습과 일치한다. 지금은 우리 모두 회개하고 다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이다. 세상의 가치와 문화와 욕망에 휩쓸려 침몰하고 있는 세월호를 살릴 길은 다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길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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