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복음과 참된 교회의 회복은 공동체성을 살리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로마서 12:4-5).

복음이 복음 되는 곳, 공동체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그렇게 큰 병을 앓아본 적이 없습니다. 수술한 적도 없고, 뼈가 부러진 적도 없습니다. 대학교 4학년에 올라가는 시점에 폐결핵에 걸렸던 적이 있습니다. 갑자기 몸무게가 현저하게 줄어들고 몸에 힘이 없어 학교 보건소를 찾았습니다. 엑스레이를 찍었더니 폐에 작은 흰 구멍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약을 한 보따리를 받아와 한 움큼씩 먹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양쪽 엉덩이에 항생제 주사를 맞았습니다. 주사를 맞는 일은 고역이었습니다. 그때 처음 항생제 주사가 아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날마다 주사를 맞으니 더 아팠습니다. 어제 맞은 자리에 다시 주사바늘이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주사를 맞고 나면 온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항생제와 폐결핵 균이 전쟁을 치르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온 몸이 붕 뜬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팔을 들어올리기 힘들 정도로 힘이 없었습니다. 치료 기간이 길지는 않았습니다. 꼭 한 달 동안이었습니다.

한 달이 되는 날 다시 엑스레이를 찍었습니다. 의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무언가 큰 일이 난 것 같아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 만에 찍은 엑스레이에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기도를 하거나 무슨 이상한 체험을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날마다 병 낫기를 위해 기도를 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의사는 그러냐고 하면서 6개월 동안 먹어야 한다며 약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약을 그날부터 먹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쳐 주셨는데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폐결핵이 나았습니다.

제 몸에서 병이 든 부위는 폐였지만 온 몸이 고생을 했습니다. 몸무게가 60 킬로에서 48킬로로 줄었습니다. 온 몸이 피곤했습니다. 치료 과정에서 고생을 한 것도 폐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고생을 한 것은 엉덩이였습니다. 주사 맞는 부위가 가장 아팠습니다. 공포감이 일어날 만큼의 쓰리고 아픈 통증이었습니다. 주사액이 들어가면 다리가 쭉 펴질 만큼 아팠습니다. 다리도 고생한 것입니다. 열이 나면 온 몸에 힘이 없었습니다. 병이 든 것은 폐였지만 온 몸이 고생을 하였습니다. 몸의 다른 기관들 모두 비상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때를 생각해 보면 몸의 각 지체들이 서로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한 지체의 기능이 수행되지 않거나 병이 들면 다른 지체들도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바로 그런 몸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영적으로 이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요? 우리가 서로에게 속해 있는 지체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고 있는 교회는 과연 얼마나 될까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 지체가 되는 법을 배우지 못해 능력이 없거나, 그렇게 되기를 스스로 원치 않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기쁨을 잃어버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건강을 잃어버린 후에야 건강의 소중함을 배운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건강 자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들은 공동체성을 상실했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가 된다는 사실 자체를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단지 자신이 구원 받았다는 사실만 주목하고 만족하기 때문에 구원이 '사후천국'이라는 교리 안에 갇힌 박제가 되었습니다. 복음은 공동체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복음은 한 몸이 된 공동체가 있어야 제대로 살아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복음이 우리에게 생명력이 넘치는 진정한 의미의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방해 요인

서로에게 속한 지체가 될 때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들을 그리스도인들이 알게 된다면 우리의 신앙 행태는 오늘날 우리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모습과 정 반대의 모습으로 변할 것입니다. 공동체는 복음의 모판이며 알짬입니다. 공동체성이 사라지면 교회는 교회일 수 없습니다. 교활하고 영리한 사탄은 복음을 공격하지 않고 교회로 하여금 공동체성을 상실하게 하였고, 복음을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따라서 복음과 참된 교회의 회복은 공동체성을 살리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교회가 공동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서로에게 소속됨을 저해하는 세력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공동체 됨을 방해하는 세력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우리는 더 효과적으로 그 장애물들과 싸울 수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는 일들이 우리에게, 우리 안에서, 우리로 인해 더 많이 일어날 때 공동체는 복음이 내포하고 있는 크나큰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기쁨에 대한 기대는 우리가 서로에게 지체가 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인들을 정면으로 직시할 수 있게 만듭니다.

기본적으로 세 가지 범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태도,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인 다른 지체들에 대한 태도가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타락 이래로 모든 인간들이 처해 왔던 소외 현상을 요약해 줍니다. 아담의 이야기는 그가 어떻게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하와로부터 소외되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인간의 죄성이 낳은 이러한 결과들은 기독교 공동체가 하나 되지 못하도록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에 대한 태도

분명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와 이웃으로부터의 소외의 근본 원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모든 문제의 원인이 '죄' 때문이라고 간단히 말하고 끝내버리는 피상적 분석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죄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고, 변명과 합리화를 일삼는 문화 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 문제를 좀 더 신중하게 통찰할 때 죄로 인해 파생되는 결과를 근절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성이 낳은 온갖 현상들은 모두 불신앙의 결과입니다. 탐욕을 부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물질적 필요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께 우리의 미래를 맡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폭력적이 되는 것은 자신의 방식으로만 일을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기심과 소유욕이라는 블랙홀에 빠지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경건생활과 예배에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홀해지고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 및 자기 자신과 조화롭게 살게 해주는 능력의 원천을 잃고 맙니다. 하나님과 평화롭게 지내지 못한다면 다른 누구와도 평화롭게 지낼 수 없습니다. 공동체의 삶을 살지 못하는 실패의 원인은 바로 불신앙에 그 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신앙이란 관계의 회복이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는 관계의 회복으로 드러납니다. 자기 자신,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 회복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관계를 아랑곳하지 않고 나만 잘 믿으면 된다는 사고는 가장 불신앙적인 사고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말의 근본적 의미는,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열렬히 갈망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필요가 충족되지 못할 때 그 결함을 채우려고 필사적으로 온갖 종류의 다른 신들을 찾게 됩니다. 소유물이나 성공이나 인간을 통해 그것을 만족시키려 할 때 그것들은 우리의 우상이 됩니다. 그러한 우상들을 통해서는 참된 인간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소유물과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실패자가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인간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할지라도 상대를 조정하려는 욕망으로 참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인간관계는 하나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으며 그럴 때라야 인간관계는 참된 기쁨이 됩니다.

특히 사람에게서 자신의 필요를 채우려고 애쓰는 한, 우리는 필연적으로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흔히 결혼관계에서 그런 결과를 보는데, 이런 기대는 배우자에게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우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차지하셔야 할 자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참된 공동체 안에서 배우는 것은, 우리의 필요가 오직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통해서만 온전히 채워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한 사람은 자신의 필요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채워질 수 있는 방식에 대해 건전한 분별을 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언제나 더 많은 것을 갈망하지만 결코 완전한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바쁜 생활이나 서먹한 인간관계들과 같은 표면적인 문제들은 실제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불안감의 근본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원인은 바로 우리 존재의 심연에 자리 잡은 영원성에 대한 갈망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필요는 오직 무한하신 하나님 한 분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갈망, 그분이 창조하신 그 갈망을 채워 주실 수 있습니다.

이것을 진정으로 깨닫게 될 때 사람에 대한 집착이나 소유욕 없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사람들 가운데서 기뻐하게 됩니다. 단순히 어떤 공동체에 소속됨으로써 갈망을 채우려 한다면 그 갈망은 커지기만 할 것입니다. 교회가 자신의 외로움을 없애 주기를 바란다면 더 깊은 소외감만 경험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만족의 원천이심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위로하고 돌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순간과 사람들을 진정으로 즐거워할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속한 지체로 산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외로움과 노고와 슬픔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 사랑의 표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궁극적 만족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사실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그분이 주시는 다른 모든 은사는 단지 그분 자신의 타당성을 가리킬 뿐입니다. 오직 그분의 은혜만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킬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해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태도를 배운다면 인생의 모든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신앙이란 바로 그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셨습니다.

2)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면 서로를 소외시키는 장벽을 허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장벽은 바로 우리 자신의 내면에 있을 때가 많습니다.

어떤 지체들은 줄 것이 없다는 자격지심으로 공동체에 속하는 모험을 감행하지 못합니다. 누구나 그런 자존감 결여로 고통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상처가 없는 사람들이 없고 그 상처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 역시 드뭅니다. 그 결과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서로 지체가 되는 관계에 자신을 내주는 것을 몹시 두려워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증오심을 허세라는 가면 뒤에 숨기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부적당한 존재라고 느낌으로써 공동체에 소속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일은 당연합니다.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마음속에 떠올려보십시오. 모두가 거절을 두려워하며 다른 사람에게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과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꺼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인간관계는 낮은 자존감으로부터 벗어날 때 가능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을 인정해주고 그들이 자신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들어주기나 긍정적인 지지와 같은 방법을 사용해 우리는 상대에게 관심을 표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귀 기울일 때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이 공동체에 영향을 끼치게 될 은사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로 다른 이들을 포용해야 합니다. 그 은혜를 주변에서 발견해야 합니다.

자신으로부터의 소외의 또 다른 측면은 우리의 필요가 충족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가끔 우리는 다른 즐거움을 통해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려고 공동체로부터 도망을 칩니다. 그 외로움이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별것 아닌 즐거움에 탐닉하느라 공동체가 줄 수 있는 온갖 유익을 놓치게 됩니다. 독립심과 개척정신은 개인의 성장에 있어 필수적인 과정이지만, 독립심은 개인주의로 빠지기 쉽고 개척정신은 방황이 되기 쉽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배우고 서로를 의지하고 힘을 합치는 법을 배울 때, 독립심과 개척정신은 우리를 모험으로 이끄는 복음의 도구가 되어 영적 성숙의 올바른 지표가 될 것입니다.

3) 다른 지체들에 대한 태도

마지막으로, 서로로부터 우리를 소외시키는 원인에 대해 파악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문화와 환경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문화에서 친밀성과 정은 사라져 가는 반면에 폭력과 범죄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잔인한 사건들도 더 이상 대도시에 국한되어 일어나지 않습니다. 폭력은 유치원 까지 침투했고, 초등학교에서의 범죄는 더 이상 낯설지 않습니다. 중학교 이상부터는 집단 범죄의 형태를 띠게 되었고 피해자가 가해자로 자연스럽게 순환하는 구조악이 성립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개인이나 나라가 서로 친밀한 관계를 맺는 법에 대해 문외한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국면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현대의 세속문화에 불만을 느끼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는데 기독교 공동체는 그들에게 새로운 대안 사회를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기술사회의 본질을 이해해야 합니다.

현대 서구문화가 산업혁명 시대를 지나 기술혁명 시대로 넘어오면서, 무수한 요소들의 상호작용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서로에게 더욱 소원해졌습니다. 가족 단위로 이루어졌던 경제활동이 다양한 직업으로 분화되면서 가족의 응집력이 파괴되었고, 가족 구성원들이 사회생활에서 겪은 좌절과 혼란을 가정에까지 가져와 가정생활의 황폐화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함께 음식을 만들거나 설거지를 하는 대신 전자레인지나 식기세척기를 작동시키면 그만입니다. 텔레비전이 가족들의 오락이나 대화 시간을 잠식해 버렸고,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은 사람들을 자신만의 공간 속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고스톱을 치기 위해 세 사람 이상 모일 필요가 없고 이메일이 보편화되면서 직접 만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관계 맺는 기술을 잃어버리게 됨에 따라 기술과 친밀성의 자리가 뒤바뀌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삶에 친밀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깨닫자 고도의 기술력으로 생산된 제품들을 광고할 때, 인간적인 이름을 붙여 좀 더 친밀한 느낌을 주려고 애를 씁니다. 김연아가 곰 인형에게 안기는 모습은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선의 기술력이 최고의 해결책이 되었고, 그것을 얻는 방법은 경제력이 좌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탐욕은 선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원하고, 그것을 지금 당장 갖고 싶다."라고 외치는 신고전주의 경제학의 주장이 복음이 되었고,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더 이상 존중되지 않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극장을 방불케 하는 시설과 음향을 갖춘 강단과 실시간으로 화면이 제공되는 최첨단 프로그램이 교회의 성공을 좌우하게 되었습니다.

이 지경이 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대체했고,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시장 가치'로 대신했으며, 선하고 옳은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모두 그것을 가능하게 한 시장의 힘 덕분이라고 말하면서 탐욕을 선으로 합리화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돈은 신고전주의 경제학이라는 학문의 면류관을 쓰고 이 시대 유일한 신으로 당당하게 등장하였습니다. 세상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당당하게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복을 받는 것이라는 메시지가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 교회가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고파는 '복(福) 시장'이 되어 저마다 '주여 삼창'을 외쳐대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개인주의와 소비주의 문화 속에서 모든 인간관계가 파괴되고, 사람들은 친밀함과 사랑을 나누는 방법 자체를 망각하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소외를 추구하면서 그 소외 때문에 자신이 외롭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아이러니 속에 빠져 있습니다.

장벽은 기독교 공동체 자체에도 존재합니다. 복음이 왜곡되어 세상의 가치관이 복음의 가치관으로 탈바꿈했을 뿐 아니라 그런 교회들에서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이상 공동체의 혜택을 믿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과거에 교회로부터 거절과 무시를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공동체를 다시 신뢰하는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과거에 겪었던 실망으로 인해 기독교 공동체에 기대를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문화와 교회의 현실이 암담해 보이지만 오히려 복음의 복음 됨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지금부터라도 교회가 서로를 긍정하고 지지해 주며 사랑하는 장소가 될 수 있다면, 그래서 참된 공동체가 줄 수 있는 기쁨을 보여줄 수 있다면, 초대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은 세상의 풍요가 주는 환상에서 깨어나 기꺼이 복음이 약속하는 새로운 세상인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그 안에서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면 알수록, 서로를 섬기며 전체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주면서 더 깊이 서로에게 속한 지체들이 될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 지체가 되어

최근 한 사진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미국 엄마가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사진입니다. 서양에서는 아이들에게 독립심을 길러주기 위해 일정 시간에 젖을 물리고 잠도 따로 자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좋지 않은 방법이라는 사고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배고프면 언제든 젖을 물리고 엄마 품에서 마음 놓고 잠자고, 엄마 등이나 가슴에 안겨 엄마와 같은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아이의 정서적인 안정과 올바른 인성에 더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고가 그들의 관습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개인주의의 결과는 외로움과 무정함과 사나움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예술인들이 모이고, 생태주의자들이 모이고, 귀농하는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어 바람직한 새로운 사회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교회는 그런 사람들을 수용하기는커녕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집단이 되어 나만 잘 살겠다는 개인주의 최후의 보루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반드시 하나님 백성 공동체의 변화된 삶으로 세상에 드러납니다. 하나님 백성 공동체만이 오직 참되고 진정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들이 자기 소외로부터 벗어나고, 이웃들과 연결되어 성령공동체를 이룰 때,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 지체가 되어 한 지체의 기쁨이 모두의 기쁨이 되고, 한 지체의 슬픔이 모두의 슬픔이 되는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함께 모여 교제하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면서 자발적으로 모든 소유를 유무상통하는 공동체의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공동체는 세상이 흔들 수 없습니다. 그런 공동체에 속한 지체들은 성공해도 실패해도 교만해지거나 넘어지지 않습니다.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고 거울이 되어 주기 때문입니다.

서로에게 속한 모든 지체들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치열하게 살아갈 때, 아무도 외롭지 않고 소외되지 않는 평화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며 그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예배이며 하나님의 영광임을 깨달아야 할 때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공동체는 복음의 모판이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주기도의 구체적인 구현입니다.

우리 사이에 여전히 담이 많이 있습니다. 가정과 교회와 이웃과 일터에서 서로의 지체가 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두려움, 불안정, 불신, 불만의 문제를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쁨이 넘치는 공동체가 되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서로에게 속한 지체가 되려고 노력할 때, 성령은 우리를 이끄시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그보다 더 안전한 보호망은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기로에 서있습니다. 살 길을 찾아 각자의 길을 갈 수도 있습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운 지체의 짐을 기꺼이 담당하려고 마음먹음으로써 한 몸 된 우리의 정체성을 지켜나갈 수도 있습니다. 선택은 오직 각자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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