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인격적인 부모이시다, 우리를 더 이상 일일이 간섭하고 보호해 주어야만 하는 어린 아이로 취급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다 큰 성인이 된 자녀로 대우해 주시고, 우리가 요청하는 한 우리들의 세상적이고 영적인, 더 나아가 설명하기 힘든 그 어떤 문제라 할지라도 기꺼이 분별의 주체가 되어 주시며, 그렇다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해 나가시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된 우리를 공동의 분별자로 대우해 주시고, 공동의 분별 과정을 통해 보다 독립적이고 성숙한 성인이 되도록 구체적으로 인도하신다. 이것을 인정했다면, 그래서 하나님과 같이 분별의 여정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면, 이젠 우리 자신들의 기본적인 자세나 태도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우리를 되돌아보는 성찰이 덧입혀질 때, 우리들이 떠날 분별의 여정은 흠 없이 준비되는 것이다. 그 어떤 여행의 성패도 준비 과정에 달려 있듯이, 분별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 결국 ‘하나님의 뜻에 합하는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여정에 지치지 않고 동행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정욕에 휩싸여 방황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추기 위해, 세상의 유혹과 사단의 방해에 흔들려 중도에 분별의 여정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을 알고 우리를 아는 일에 결코 만홀할 수 없다.

100주년기념교회의 이재철 목사도 신앙의 성숙을 갈망하는 자들을 위한 그의 책 『성숙자반: 홍성사 2011』에서 ‘성숙한 믿음을 위해서는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알고 또 나를 알아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지피지기(知彼知己)’의 믿음을 강조했다. 마찬가지로 얼마나 더 지독히 하나님을 알려고 갈망하는가와 얼마나 더 지독히 우리 자신의 수준을 알고 인정하느냐에 따라 분별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케이트 선수가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드러내 보이기 위해 우선 빙판의 성질과 자신이 신어야 하는 스케이트의 재질에 대해서 충분한 사전지식을 갖춰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린 시절에 형으로부터 물려받은 녹슨 롱 스케이트를 신고, 기쁜 마음에 무턱대고 얼음판에 뛰어들었을 때의 그 아슬아슬했던 기억이 나는가? 앞으로 넘어지고 뒤로 넘어지고... 무턱대고 스케이트를 탄다는 흥분의 대가로 얻었던 몸의 멍은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족해야 한다. 소위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겠다는 성인으로서의 우리는 좀 더 신중히 자신의 수준을 알고 얼음판에 뛰어들어야 한다. 분별의 파도를 타야 한다. 어린 아이에게 난 멍은 쉬이 치료되지만 조금만 심하게 움직여도 뼈마디에서 우두둑우두둑 소리가 나는, 오십견과 더불어 사는 우리들의 멍은 평생 갈 수도 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를 알 때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별의 과정에 초대받은 자들로서 과연 초대에 응할 준비가 되었는지 점검할 일이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이하러 가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 보듯이, 신랑을 맞이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등을 가지고 가면서 기름 없이 가는 일이 없도록(마 25:1-13), 주님과 함께 분별의 여정을 떠나려는 자들은, 그렇다고 마치 히말라야 정상에 오르는 것처럼 대단한 체력 훈련과 산악장비를 준비할 필요는 없지만, 철저히 마음가짐을 점검하고 바로 세워야 한다.

그렇다고 지레 겁 먹을 필요는 없다. 하나님이 언제 완전한 자를 골라 쓰셨던가? 아브람은 사라와 하갈 두 여자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소심한 자였고, 나중에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아내를 두 번씩이나 이방의 왕에게 넘긴 자이기도 했고(그런 아브라함이 우리들의 믿음이 조상이 된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일 수밖에 없다), 야곱은 장자권에 눈이 멀어 형을 속인 교활한 자였고, 요셉은 형제간에 이간질을 하는 말이 가벼운 자였고, 모세는 성격이 급한 살인자였고, 그래서 나중에 그런 성격으로 인해 지팡이를 잘못 사용해 가나안을 눈 앞에 두고 죽어야 했으며, 기드온은 지극히 소심한 자였지만 탐욕이 과한 자였고, 양치기에 불과했던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는 강도 짓을 했고 후에는 부하의 여자를 취하고 살인까지 저질렀던 자였고, 베드로는 성급한 자였고 칼을 사용하던 자였으며, 바울은 스데반을 죽이는 데 앞장섰고 하나님을 핍박하던 자였고 동료간에 갈등을 일으킬 정도로 성격이 불 같은 자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완벽함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아니던가? 하나님은 하다못해 길가의 돌멩이를 통해서도 기적을 베푸실 수 있는 분이며(마 3:9),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에서 나오는 찬송까지 완전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신가(마 21:16)? 그러니 하나님이 주도하고 인도하시는 분별의 여정에 우리가 동행하는 데에는 그 어떤 자격도 필요 없다. 배경도 필요 없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용기와 그러면서 하나님을 앞질러가지 않고 뒤따라가고자 하는 겸손과 그럼으로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인 영적인 자유함만 있다면...

겸손에 대해서

성공적인 분별을 위해 분별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는 겸손이다. 분별은 겸손으로 시작해서 겸손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의‘남아프리카의 성자’라고 불리는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는 그의 책 『겸손: 생명의 말씀사, 2013』에서‘겸손’을 사회적 도덕개념의 하나가 아니라 기독교의 핵심 원리라고까지 말했다. 그는 겸손이, “있으면 좋은 미덕이라든지 아니면 여러 가지 성령의 은혜의 선물중의 하나라기보다는 모든 은혜나 미덕의 뿌리”라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은 우리의 구원이 되고, 그의 구원이 우리의 겸손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러면서, “겸손은 흔들림이 없는 잔잔한 심령이다. 그러므로 그 심령은 걱정 근심에 빠지지 않으며, 귀찮아 하거나 괴로워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아무도 칭찬해 주지 않아도 잔잔하며, 불평과 멸시를 받아도 잔잔하다. 그 심령은 주 안에 거하며 은밀한 골방에서 그분과 대화하며 그분의 능력으로 살며 어떠한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잔잔한 심령으로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 잔잔한 심령, 즉 주 안에 거할 때 우러나오는 그런 겸손이 우리 안에 생겨야만 하나님께 우리의 분별의 주체 권리를 넘겨드릴 수 있다.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심령, 내 안의 거짓된 자아가 손짓하고 있을 때 뿌리칠 수 있는 심령, 주위의 평판이나 평가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건한 심령이 있을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문제를 걱정 없이 맡기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주님의 평화를 맛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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