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비합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비논리적이다. / 그래도 사랑하라. // 당신이 선한 일을 하면 이기적인 동기에서 하는 것이라 비난을 받을 것이다. / 그래도 좋은 일을 하라. // 당신이 성실하면 거짓된 친구들과 참된 적을 만날 것이다. / 그래도 성실하라. // 당신이 선한 일을 하면 내일엔 잊혀질 것이다. / 그래도 선한 일을 하라. //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 받을 것이다. /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 당신이 여러 해 동안 만든 것이 하룻밤에 무너질지도 모른다. / 그래도 만들라. // 사람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도와 주면 공격할지도 모른다. / 그래도 도와 줘라. //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면 당신은 발길에 채일 것이다. / 그래도 가진 것 중에 제일 좋은 것을 주어라.

캘커타에 있는 어린이집 벽에 테레사 수녀가 붙여 놓은 케이스 켄트의 글이다. 테레사 수녀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분의 부르심에 따라 살았다. 그녀는 자신의 부르심을 이렇게 말했다.
“부르심이 뜻하는 것은 아주 단순했다. 내가 로레토 수녀원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난한 사람들 중에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뜻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가장 가난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 하나님을 섬겼다. 그러나 이 간단한 말에는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다. 그녀는 그 의미를 잘 이해했기 때문에 자신이 붙여 놓은 글의 내용대로 실천할 수 있었다.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가장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까지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

오래 전 아프리카 감비아에서 활동했던 이재환 선교사는 유럽에서 온 인본주의자의 헌신적인 봉사를 이야기하면서, 그리스도인이 인본주의자보다 못하다면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그리스도인이 인본주의자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바로 그 대답을 테레사 수녀가 전하고 있다. 그녀는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가장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여기까지는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로 들어간 인본주의자와 다를 게 없다. 하지만 다른 것이 있다. 인본주의자는 헌신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섬겼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간 테레사 수녀는 하나님을 섬겼다. 그녀에게는 가장 가난한 그 사람들이 하나님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본주의자의 섬김과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차이가 시작된다.

섬김에 대한 테레사 수녀의 이해는 그녀가 설립한 사랑의 수녀회의 입회서약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수녀가 되려면 청빈, 정결, 순명을 실천하겠다는 서약을 한다. 그런데 사랑의 수녀회에는 한 가지 서약이 더 있다. 가장 가난한 자가 되어 가난한 자들을 섬기겠다는 서약이다. 가장 가난한 자들을 섬기기 위해 그녀들은 가장 가난한 그들보다 더 가난하게 살겠다는 서약을 한다. 이 서약에는 깊은 영적 의미가 들어 있다.

진정으로 섬기려면 섬기려는 자보다 더 낮은 자가 되어야 한다. 보통 스승은 제자의 발을 씻어 주지 않는다. 선생은 제자보다 우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선생이 제자의 발을 씻어 주면 제자 된 자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가만히 있는 제자는 올바른 제자가 아니다. 그래서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 베드로가 주님을 만류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의미를 베드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의 사고에는 맞지 않는 잘못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하는 일을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하나,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요 13:7).

가장 작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영적인 일이었다. 기독교 신비 가운데 가장 큰 신비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섬기는 지극히 작은 사람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섬기는 지극히 작은 사람, 가장 가난한 사람은 예수님 자신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보다 높은 자리에 서선 안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가장 가난한 사람보다 더 낮은 사람, 더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섬김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과 무신론자인 인본주의자들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섬김이 모두 영적인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섬기는 자가 섬김을 받는 자보다 더 작아지고, 더 낮아져야 하는 것은 기독교 고유의 신비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움에 처한 이를 돕는다고 해서 그들을 섬겼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우월감을 가지고 얼마든지 어려움에 처하거나 궁핍에 처한 사람을 도울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영적인 일이 되고 신비가 되려면 섬김을 행하는 우리 자신이 섬김을 받는 가난한 자들보다 더 가난해지고, 더 낮아져야 한다. 우리의 섬김이 영적인 일이기 때문에, 테레사 수녀는 자신에게도, 우리에게도 “그래도 사랑하라. 그래도 좋은 일을 하라. 그래도 가진 것 중에 제일 좋은 것을 주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일이 바로, 그 신비가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이다. 초기 교회의 성도들은 그것을 잘 이해했다. 그들은 ‘그리스도 찬가’로 알려진 찬송을 부르며 주님의 마음을 품고자 노력했다(빌 2:5-10). 하나님이신 주님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8). 이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섬김이다. 우리도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과 같이 낮아지고, 죽기까지 순종하여, 십자가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테레사 수녀가 벽에 붙여 놓은 글을 묵상해 보라. 베풀고, 나누는 봉사 자체도 이기적인 존재인 우리에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섬김은 단순히 베풀고 나누는 정도가 아니라 가장 가난한 자가 되고, 가장 낮은 자가 되어야 가능한 섬김이다. 그리스도께서 몸소 지극히 작은 사람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지극히 작은 사람보다 더 낮아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섬김이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의무가 아니라 오히려 특권이다. 마르다와 마리아처럼, 베드로의 장모처럼 최선을 다할수록 더욱 기쁨에 겨워하게 될 것이다. 최선을 다한 후에도 아쉬움이 남고, 우쭐한 마음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 섬김의 특징은 낮아짐과 기쁨과 겸손이라 말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요13:14).

주님이 우리에게 “~하라”고 명령하실 때는 그 일에 반드시 하늘의 풍성한 영적 선물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서로 섬길 때, 그런 우리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 우리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허리를 굽혀 섬기는 자는 위를 보지 않는다. 주님은 언제나 가장 낮은 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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