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롬12: 8).

21세기 교회

21세기가 시작되기 전에 사람들은 교회가 몰락하고 사이버상의 교류가 증가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이 일부 사실로 드러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 현상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각종 인터넷 기기의 발전으로 홀로 지내는 것에 익숙해지자 그 반대 현상으로 만남을 더 목말라 합니다. 막상 만나는 일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쉽게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방법 두 가지가 대두되었는데 하나는 동호인들의 모임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의 모임입니다.

자신을 완전히 열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곳이 교회가 되었습니다. 모임은 유지되지만 실상 교회의 본질은 사라진 것입니다. 사람들의 만남이 피상적이 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사랑이 소멸됩니다. 껍데기로 만나서는 사랑을 나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런 모임이 되어버렸습니다.

교회 밖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세상을 장악하고 점점 더 몰인정한 곳으로 만들어갑니다.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된 세상은 불균형이 심화되어 약육강식의 정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선진국에서는 쓰레기로 버려지는 음식이 수조 원에 이르러 그것을 처리하느라 골머리를 앓는데 후진국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의 균형을 잡아줄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인데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이 소멸되면 세상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21세기 교회는 세상의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회복된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사랑이 드러나는 표지가 바로 격려와 나눔의 은사입니다. 기독교 공동체 자체를 위해서도 필수적이지만, 냉랭해져 가는 이 세상에 빛으로 드러나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보여 주어야 할 두 가지 은사가 바로 격려와 나눔의 은사입니다.

격려의 은사

도서관에서는 공부가 잘 됩니다. 약속을 한 것은 아니지만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뿐 아니라 정치적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슬픔을 나누기 위해, 더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더 나은 배우자가 되기 위해, 성공적인 결혼을 위해, 물건을 싸게 구입하기 위해 모임을 가지면 그 목적을 더 쉽게, 더 효율적으로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권위, 곧 권면하고 위로하는 은사가 가진 힘입니다.

로마서 12장 전체가 격려이며, 바울은 격려의 은사가 있는 사람들에게 그 은사를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는 데 사용하라고 권고합니다. 바울이 사용한 단어는 로마서 12장을 시작하며 독자들에게 그들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고 '권고' 했을 때 사용했던 동사의 파생어입니다. 바울은 이 개념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고린도후서 서두에서도 우리가 받았던 위로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 주라고 말합니다(1:4).

그 단어의 의미는 '격려하다', '위로하다', '촉구하다', '탄원하다', '경고하다', '타이르다', '훈계하다' 등 광범위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사용된 단어의 의미 역시 넓게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은 공동체의 지체들이 서로를 세워 주기 위해 각자의 영적 은사를 사용하는 행동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 그 단어를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개념은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얼마나 큰 격려를 줄 수 있는지에 대해 놀라운 그림을 보여 줍니다.

일할 때에만 다른 이들의 지원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슬픔과 고통을 당할 때 위로해 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인생은 '고'(苦)라고 말할 정도로 어려움의 연속입니다. 누구에게나 슬픔과 고통이 닥칩니다. 그럴 때 슬픔과 고통을 이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위로와 격려입니다. 누군가 내 맘을 안다는 사실만으로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범하는 잘못은 성경말씀 몇 구절 읽어 주고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선의에서 비롯되었을지라도, 낙심하고 절망한 지체들을 더욱 아프게 만듭니다. 성급하게 제시하는 성경 말씀은 듣는 사람이 단순한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느끼게 만듭니다. 삶의 문제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드러난 현상만으로 다 파악할 수도 없습니다. 당사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복잡한 요소들이 뒤엉켜 있습니다. 따라서 단순한 해답은 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통을 더할 뿐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또 다른 잘못은 기도하겠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에게 함께 기도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는 공허하기 이를 데 없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하겠다는 말을 하기 전에 가지고 있는 것을 전부 내놓으라고 말합니다. 최소한 밥 한 끼라도 대접한 후에 기도하겠다는 말을 해야 합니다. 기도하겠다는 말이 책임 회피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동사는 서로를 세워 주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상처 받아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위로는 고통 한가운데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빈말이 아니라, 따뜻한 포옹과 하나님의 용납 속에서 느끼는 자유입니다. 고통 중에 있을 때 슬픔과 두려움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 두려움과 슬픔을 정리할 수 있도록 함께 있어 주는 사람, 낙담하지 않도록 격려해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위로와 격려의 형태는 다양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격려하는 사람의 영성입니다. 무엇보다 필수적인 것은 공감입니다. 또 다른 특징은 부드러움입니다. 격려의 은사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세워 주고 동기를 부여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모두 격려의 은사를 사용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이 은사를 잘 활용하기 위해서 주변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7절에서 바울은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가 될 때 격려로 사람을 세우고 공동체를 세우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나눔의 은사

나눔의 은사, 즉 관대함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아낌없이 자기 것을 내어 주는 것은, 소유가 더 많기 때문이 아닙니다. 소유에 대해 좀 더 자유로운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가지면 더 많이 베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더 많이 가지면 그만큼 필요한 것도 많아져서 항상 부족함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나눔은 생각이 달라야 실천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그 헬라어 '메타디도미'에 대한 최선의 번역은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기' 혹은 '나누어 주기'일 것입니다. 재정적 나눔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돈 이외의 다른 많은 것들도 아낌없이 나눌 것을 요구하십니다.

특히 나눔의 은사는 기독교 공동체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과 중요한 연관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필요한 것은 "내 것은 무엇이든 당신의 것"이라는 마음 자세입니다. 히브리어 인사말 '샬롬'은 이러한 개념을 잘 정리해 줍니다. 샬롬은 전쟁이 없는 상태의 평화로부터 가진 것이 충분한 상태의 평화에 이르기까지 온갖 의미의 평화를 의미합니다. 샬롬은 번영, 만족, 실현, 성취, 복지, 건강, 온전함 등 폭넓은 의미 영역을 가집니다.

유대인이 진지하게 샬롬이라 말하는 것은 상대방이 온전함을 경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적 표현입니다. 굶주린 이에게 샬롬이라 말하는 것은, 자신의 점심을 나누며 최대한 그들을 돕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는 야고보서의 지적은 유대인들의 샬롬을 잘 설명해 줍니다. '샬롬, 샬롬' 반복하는 것은 반드시 최선을 다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오늘날 세계 인구의 3/4이 매일 밤 굶주린 배를 움켜 쥐고 잠자리에 든다고 합니다. 아낌없이 베푸는 은사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세상입니다. 또 다른 번역들은 '아낌없이', '관대하게', '후하게'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용어들 모두 열린 마음을 가리킵니다. 열린 마음은 지갑을 열며, 냉장고를 열며, 시간을 열며, 모든 소유물과 재능까지 열도록 합니다.

하지만 현대 문화는 '너 자신은 너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그런 와중에 대책 없이 자신의 소유를 상대방의 필요에 따라 나누려면 많은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좀 더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우리의 소유를 다른 이들의 필요에 부응하여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눔의 은사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태도이며 마땅히 살아내야 할 도리라는 것 역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성실함으로"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목적에 대한 단일성을 표현할 때의 신실함' 혹은 '동기의 순전함'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베풂의 은사가 공동체 내에서 건설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단순성과 순전함이 필요합니다. 자랑하려고 남에게 베푸는 것은 순수하지 못한 행위입니다. 도움을 주었으니 안 하는 것보다 낫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는데 그 대답은 '아니올시다'입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그와 같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단순하고 순전한 마음이어야 도움 받는 사람들에게 굴욕감을 주지 않습니다.

또 자신의 것을 전부 내어준 뒤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해 살아가는 삶 역시 올바른 베풂이 아닙니다. 무책임한 행동이며, 덕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의 전적인 의탁은 필요한 일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최소한의 것만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가능한 많은 것을 나누는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몫을 절약해 나누려는 자세가 올바른 자세입니다. 필요 이상으로 쌓아 놓지 않고 사는 삶이 바른 삶입니다. 더 열심히 일해서 다른 이들을 돕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정상적인 태도입니다.

나눔의 은사는 기독교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해줍니다. "불의에 저항하는 것은 개개인이 할 수 있지만 정의를 행하는 것은 오직 공동체만 할 수 있는 일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회악에 대한 저항은 개인적으로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바꾸어 놓는 일은 오직 공동체로 뭉칠 때 가능합니다. 정의를 세우는 일은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과업입니다. 관대하게 나누어 주는 일에 우리가 하나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 일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분배적 정의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지구상의 모든 재화들이 공평하게 나누어질 때까지 불평등의 해소를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하나님 백성 공동체들의 구역이 확대되어 마침내 온 세상을 포괄할 때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세상이 점점 더 살기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인심은 점점 더 각박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어둠이 짙으면 조그마한 빛도 부각되기 마련입니다. 작은 불을 켜야 할 때입니다. 가진 것이 별로 없어도 극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생각하면 절약할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마게도니아 성도들은 가난에 처해 있으면서도 예루살렘 교회에 기근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연보를 하였고 바울은 그들의 헌신을 칭찬하였습니다. 그들은 금식하면서까지 절약한 것들을 나누었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와 같은 모습을 보여야 할 때입니다. 가난에 처해 있어도 열린 마음으로 가진 것들을 나누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격려와 위로의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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