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에 대해서 2

겸손의 근본이 뭔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고, 우리의 피조물됨을 솔직히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별의 주체이시다’라는 전제에 동의한 자라면, 겸손의 기본은 갖춘 것이다. 그리고 분별의 결과에, 그것이 어떠하든 순종하며 따르겠다는 각오가 분명히 서 있다면 역시 겸손의 마지막 테스트도 통과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들의 이러한 겸손의 고백 없이 분별을 시작한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 자신이 분별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교만의 꼬리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감추어진 혹은 고백되지 않은 교만은 분별의 과정 중에 부지불식중에 나타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우리들의 친밀한 관계를 이간질하고, 우리의 초점을 산만하게 하며, 결국에는 자신만의 세계 속에 갇히게 될 것이다.

스캇 펙이 악의 원인에 대해 밝힌 책 『거짓의 사람들: 비전과리더십, 2015』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런 교만의 씨앗이 우리를 악의 근원인 병적인 나르시시즘에 빠지게 해 복종할 줄 모르는 자기 의지를 강화할 것이다. 더 이상 주님이 알려 주신 대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게 아니라 “당신 뜻대로 마옵시고 제발 내 뜻대로 하게 하옵소서”라고 주장하게 될 것이다. 교만이 우리의 주인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교만은 불순종을 낳고 결국 멸망의 선봉이 될 것이기(잠 18:12) 때문이다. 이런 교만이 없는 마음의 상태가 곧 히브리어 ‘아나와’로 표기되는‘겸손(humility)’이고, 이런 상태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잠언 15:33에는 동일한 수준으로까지 병치하고 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면 지혜를 얻는다. 사람은 영예(명예)를 얻기에 앞서 먼저 겸손해야 한다.” 이런 겸손은 결국 잠언 18:12의 말씀과 같이, ‘존귀의 길잡이’가 된다.

 
개신교나 가톨릭의 문턱을 넘어, 구름 위를 떠다니는 영성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영성을 추구하면서 21세기 우리에게 분별력의 기초를 제공해 준 가톨릭 예수회의 창립자이자 영적인 스승인 이냐시오 로욜라(1491-1556)의 『영신수련』165-8편에는 세 종류의 겸손에 대해서 정의하고 있다.

첫째 겸손은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주님에게 복종시키는 것이고[‘주께 드리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I surrender all)’의 찬송가 가사와 같이], 둘째 겸손은 우리 마음의 태도를 말하고[‘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무슨 일이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골 3:12)], 셋째 겸손은 예수님과 함께 가난하기를 택하고, 명예를 추구하기보다 예수님과 함께 모욕 받기를 원하고, 결국에는 예수님을 위한 바보가 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그러니 겸손의 시작은 비록 우리들의 인간적인 각오와 작정일 수 있으나 그 끝(telos), 그 지향점은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영적인 자유함(Spiritual Freedom)』의 저자이자 이냐시오의 『영신훈련』을 가르치는 존 잉글리쉬 신부는 겸손의 완성이라고도 볼 수 있는 셋째 겸손에 대해 고린도후서 12:7-10에 있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인용하며 우리를 격려한다. 겸손은 결코 우리 스스로의 노력과 각오로 달성되는 결과물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의 부족함과 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며, 그런 상태에서 주님과, 그의 부활의 영광만이 아닌 그의 삶의 고난과도 동행할 때, 그리고 그런 고난의 한가운데서 도리어 기뻐할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성경적 ‘겸손’의 영어 단어는 humility이다. 이 humility라는 단어는 일반적인 태도로서의 ‘예의’나 ‘겸손’이나 ‘매너’보다 더 낮은 ‘비천’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비천’의 어감이 다소 부정적이라 한국어 성경에서 ‘겸손’이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바꿔 사용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비천’을 흔히 세상에서의 인간관계의 공손이나 예의범절 정도로 가볍게 치부한다면 그것 역시 겸손의 본래의 의미를 잘못 전달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다뤄지는 일반적인 예의로서의 겸손은 외형적이며 형식적인 면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영어의 politeness는 다듬어지고 세련됨의 의미이고, civility는 도시다움에서 연유됐고, manners는 손으로 숙련됨을 말하며, etiquette은 공공의 합의된 규칙이며, curtsy는 궁중에서의 상하간 예절을 말한다.

반면 비천으로서의 겸손은 라틴어 어원인 휴무스(humus) 즉 ‘흙’ 혹은 ‘땅’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삶의 근간을 말하는 것이고, 하늘과 상대되는 가장 낮은 위치를 말한다. 따라서 비천하다는 것이 결코 과장된 표현은 아니다. 인간이 뭘로 만들어졌는가? 바로 흙이고 땅이다! 인간의 본성 그 자체가 비천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비천할 정도의 겸손에 대해서 미국의 코칭 전문가 케빈 홀만큼 영감있게 정의한 자도 드물다. 그는 그의 책 『겐샤이』에서, ‘씨앗을 비옥한 땅에 심으면 훨씬 더 큰 것으로 탈바꿈해 풍성한 수확을 이루듯이, 이 모든 것이 양질의 토양인 후무스 곧 겸손과 함께 시작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 삶에 충분한 휴무스, 곧 겸손이 있다면, 우리는 자라고 발전하며, 우리 주위에 있는 것들을 무성하게 자라나게 할 것이라고 말하며, 겸손은 배울 수 있는 능력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태어나고 죽는 것이 모두 ‘흙’ 안에서 이뤄지니 ‘겸손’이란 우리 인간의 근본이요 고향과도 같은 것이고, 이 흙에 만물이 자라도록 하시는 이는 주님이시니 역시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처럼, 흙은 그냥 흙일 뿐이다.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했다, 그 하나님과 동행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그분에게 나의 분별의 주도권을 넘겨드린다는 것은 소위 법적인 계약의 상태에서 갑과 을이 뒤바뀌는 것으로 일상적인 겸손의 수준을 초월하는 것이다. ‘종’의 신분됨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준의 겸손을 갖춰야만 우리는 하나님과의 분별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너무 지나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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