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3)

주전 13세기,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모습은,

첫째, 씨족 공동체인 지파 동맹이었다(사사기를 보라). 그들은 민주주의적 유목민의 삶을 살았는데, 공동체의 초점은 하나님의 언약궤(법궤)에 있었다. 성막에 안치된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며 여러 지파들은 그들의 헌신을 다짐하기 위하여 축제일에 모였다(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둘째, 지파 동맹은 엄격하고 완강한 신정정치 양식이었으며, 이스라엘은 유목민(목축)이었는데 영농국가로 급격한 변신을 하게 된다. 즉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들의 우수한 문명과 물질 문화에 물들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여호수아가 죽고도 200년 동안 사사 시대의 지파 동맹은 존속되었다. 이는 여호와가 다스리시라(삿 8:23) 라는 기드온의 말 속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삼상 8장에 사무엘 선지자가 왕정제도를 이방제도의 비겁한 모방이자 여호와에 대한 극악한 배반으로 거부한 사실에서 볼 수 있다(삼상 13:19 참고).

셋째, 블레셋을 비롯한 이방 민족과의 생존을 건 싸움이 팔레스타인에서 상존하였으며, 특히 주전 1050년경 블레셋과의 전투(삼상 4장)에서 언약궤까지 빼앗기게 된 이스라엘은 군사적 그리고 영적인 치욕을 당하게 된다.

넷째, 이러한 치욕과 위험에 직면한 이스라엘이 첫번째 시도한 일은 왕이 다스리는 국가의 건설이었다(삼상 8:5).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여호와의 영의 도움을 받아 사울을 왕으로 세웠는데,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므로(삼상 15장)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블레셋 전투에서 죽게 되고(삼상 31장),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기름 부으신(사울로부터 하나님의 영이 이전된) 다윗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삼하 2장).

다섯째, 다윗은 우선 옛 전통을 잘 지키는 것처럼 행동하였다 그 예로 사울의 딸, 미갈과 결혼했는데, 사울에 의하여 강제로 헤어졌으므로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을 때 미갈을 데려오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사울은 곧 이스라엘을 전적으로 변화시키려고 했다. 즉 이스라엘을 하나의 결속된 국가로 통일시키려는 노력을 경주한 것이다. 다윗은 여러 번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하게 된다.

여섯째, 이방 민족과의 전쟁이 끝났을 때 정복한 영토가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번영의 기반을 닦아 놓을 수 있었다. 이스라엘 나라의 백성들은 다윗 왕국의 백성들로 그 정체성을 만들어 갔다.

이는 여호와의 백성들이 다윗 왕국의 시민이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솔로몬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
1) 지파 동맹은 왕이 중심이 되는 국가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그리고 다윗이 가나안 도시들을 정복해 감으로써 그 주민들이 이스라엘에 흡수되어 이스라엘은 다국적 제국이 되었으며, 솔로몬의 결혼 정책으로 인하여 이방 종교가 유일신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종교 체제로 바뀌어갔다.

2) 다윗은 경제적인 기반을 닦았고 솔로몬은 이방과의 무역 등으로  경제적인 번영을 이룩해 태평성대를 맞이했다. 그 후 이스라엘에 고난의 시대가 이르면서 백성들은 행복했던 옛날을 그리워하고 향수에 젖게 된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은 다윗의 시대를 메시아의 시대로 정의하게 되었다.

3) 다윗은 통일된 국가의 제의에 걸맞게, 기얏여아림에 방치되어 있었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와서 성막에 안치하고 제사를 드렸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을 이어 예루살렘에 성전을 신축하게 되는데 이는 국가적 신앙의 회집 장소로서, 사무엘 선지자 때에도 있었던 산당(예, 기브온 산당)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의 진정한 임재의 처소로 예루살렘의 위신을 높이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국가의 목적과 종교의 목적이 아주 밀접하게 결탁하는 경향이 생겨났으며, 국가는 제의를 지원하고 제의는 국가를 위해 존재하므로 제사장이 왕(국가)의 부속 기관이 되어갔다. 이스라엘은 다윗 왕국을 하나님의 나라로 생각하고, 그 안에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세우셨다고 잘못 상상하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 나라와 이스라엘 왕국을 동일시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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