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로마서 12:8b).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종이라는 단어는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의미를 더 살려내기 위해 머슴이나 노예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종이라는 단어는 자주 사용되고 있으면서도 본래의 의미를 상실해 버렸습니다.

게다가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모습을 어렵잖게 볼 수 있습니다. '주의 종'이라는 말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목사를 '주의 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른 성경 이해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종으로서 세상의 종들과 달리 종 된 자신의 정체성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을 섬겨야 할 목사들이 섬김을 받고 군림하는 태도를 보임에 따라 종이라는 단어는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용되는 종이라는 단어 역시 공허해졌습니다. 종 된 자세로 섬긴다는 것은 머릿속 이해일 뿐 그 반대의 행동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놈의 종님'이라는 자조적인 농담이 생겨나기도 했고, 본래의 의미로 되돌리기 위해 '주님의 종놈'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도 생겨났습니다.

교회 전체가 잘못되었음을 보여 주는 바로미터입니다. 섬김이 사라진 교회는 더 이상 교회일 수 없고, 군림하고 지배하는 교회는 세상과 다를 바 없습니다. 세상과 달라야 하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세상과 같아진 것은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에 의해 복음이 훼손되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제도가 되었고, 제도가 된 교회는 서로에게 은혜를 공급하는 통로가 되는 가장 큰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 지체라는 사고는 이상이 되었고, 진정한 교제와 친밀한 관계가 사라졌습니다. 세상과 마찬가지로 남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경쟁에서 이긴 사람들만이 지도자의 자리에 설 수 있으며, 지도자들이 모든 권력을 가지고 다른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의 자비 역시 참된 희열을 상실하고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시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든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자리에 이르기 위해 물질의 축복을 추구하게 되었고 물질의 축복을 하나님의 인정과 동일시하는 엄청난 오해와 타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본문은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기독교 이해인가를 지적해 줍니다.

리더십 –지도하는 일이면, 근면함으로!

사람들의 생각은 다양합니다. 또 각자가 처한 입장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일에는 또 다른 은사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리더십 은사입니다. 리더십 은사를 가진 사람을 리더로 세우면,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에게 적합한 다른 방식으로 모임을 섬길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리더십 은사는 사람들의 의견을 하나로 모아 공동체의 방향을 정할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은사를 발휘할 수 있도록 섬기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종에 관한 바른 이해입니다. 리더십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철저하게 자기를 비워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리더십 은사가 제대로 발현될 수 없습니다.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서도 안 됩니다. 며칠 전 한 원로 목사님이 자신이 한국교회에 세습의 빌미를 제공한 것에 대해 공개사죄를 하였습니다.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그릇된 결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리더십의 은사는 가장 은혜가 많이 필요한 은사인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어려운 은사입니다.

바울의 은사 목록에 나오는 여섯 번째 은사인 지도하는 일은 헬라어 동사 '프러히스테미'에서 파생되었는데, 이를 직역하면 '앞장서다'라는 뜻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 그들로 하여금 바람직한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하다', 곧 '안내하다', '지도하다', '인도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그 동사는 신약성경의 어떤 구절에서는 '어떤 일에 집중적으로 헌신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의미가 들어 있어서, 번역도 다양하지만, 로마서 12장의 주제가 '공동체'이므로 이에 맞추어 이곳에 쓰인 단어의 의미를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로마서 12장의 주제가 교회의 모든 지체들의 동역인 것을 생각해 볼 때 리더십의 은사를 교회의 공적 직위에 한정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울은 공동체 안에서 리더로 인정되는 내적 권위를 지닌 사람들을 격려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동안 은사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어 왔습니다. 즉 은사는 공동체의 유지 건설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며, 어떤 은사가 다른 은사에 비해 우월하다거나 열등하지 않으며, 한 사람에게 꼭 하나의 은사가 있는 것이 아니며, 보통 때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은사가 특별한 상황에서 발견될 수도 있으며, 은사로 여기지 않았던 것들이 실제로는 매우 중요한 은사라는 사실 등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기에 각 개인이나 공동체 안에 서로 상관관계가 있는 은사들이 결합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덧붙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디모데전서 5장 17절은 본문과 동일한 동사를 사용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 보듯이 다스리는 일과 관련하여 말씀과 가르침이라는 은사가 결합되어 나타납니다. 그것은 그것들이 얼마나 상호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자신의 어떤 은사를 통해 또 다른 은사들이 더욱 효과적으로 사용되거나 상관관계가 있는 다른 은사를 자신 사람들끼리 한 팀을 이루어 일하게 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가 은사의 핵심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은사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실 때 그것을 알아보고, 감사하며, 필요한 모든 상황 가운데 그것을 은혜의 통로로 적절히 활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은혜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의 사람은 지배하거나 군림하지 않습니다. 지도자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사용함으로써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관리나 리더십 은사는 '열심히 일하기 위해', '열정적인 노력과 동기로 지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헬라어 명사는 '열의'나 '기꺼이 정력과 노력을 다하려는 자세'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장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배우라고 축구합니다. 리더십 은사를 돌봄과 결합시키기 위함입니다. 리더십 임무에 대한 특별한 긴박성과 열정은 돌봄의 열의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리더십에는 공동체의 유익을 추구하는 마음 자세가 가장 중요합니다.

불순한 동기 때문에 리더십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이들이 개인적 이익이나 권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그릇된 야망의 결과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의 뜻에 고정되어 있고 그것을 성취하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적이 될 때 기쁨은 시들지 않고 리더십 역시 자기중심성으로 손상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동기는 항상 불순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깊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마음속의 불순한 동기와 지배욕을 제거할 수 있을 때 종으로서의 섬김이 가능해지고 열정을 가지고 일할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이 순수해질수록 우리의 노력은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질 것이며, 그분의 목적은 충만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도 더욱 커질 것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성향이야말로 참된 공동체를 파괴하는 가장 큰 위해요소(危害要所)입니다. 하지만 동기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지속적인 싸움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지면, 성장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리더십의 은사를 근면함으로 사용할 것을 요구합니다. 돌봄과 결합한 열정적인 리더십은 일 중독증으로 인한 과도한 생산성과 대충 일하려는 안일함 사이에 균형 잡힌 리더십을 발견하게 해줍니다. 하나님 백성 공동체에 속한 지체들은 몸된 공동체에서 모든 지체들의 은사를 이끌어내는 탁월한 리더십을 이 세상에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아말로 복음이 가지는 위대한 희망입니다. 모두가 열심히 일하고 능력에 상관없이 모두가 동등하게 살아갈 수 있으며, 아무도 희생되지 않는 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리더십 역할이 지역 교회의 목회자에게 집중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사람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역할과 관심은 공동체에 해롭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 보듯이 업무 분할이 필요합니다. 리더십 은사가 모든 것을 주도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힘이 아니라 사랑이 동력이 되는 나라입니다. 그런 이해가 전제가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다른 업무를 맡아 서로에게 속한 지체로서 평등한 공동체를 세우고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자비(친절) -자비를 베푸는 일이면, 희열 가운데!

바울은 일곱 번째 은사로 자비 또는 친절의 은사를 들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문맥을 살펴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바로 다음 구절의 권고가 그 은사가 실천되는 방식에 대해 중요한 수식어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사랑엔 거짓이 없다는 말은 그 사랑이 위선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돕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만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서도 안 되지만, 사랑 없이 행해지는 자비 또한 무의미하고 위선적이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일이 희열 가운데 행해져야 한다는 점을 바울은 강조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입니다. 은사를 사용할 때 자연스럽게 기쁨이 우러나올 수 있다면 따로 복음을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쁨은 복음의 복음됨을 드러내는 가장 명확한 증거입니다. 기쁨과 평안이 초대교회에는 있었고 그것이 바로 초대교회 성장의 비결이었습니다. 당시는 복음을 함부로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기쁨은 복음을 사는 이들의 표정에 언제나 드러나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다가와 기쁨에 동참하고자 했고 그들은 마침내 복음 안에서 형제자매가 되어 더 큰 기쁨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일의 과정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은 그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없습니다. 스트레스와 불확실성에 압도된 이 시대에 기쁨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입니다. 그 기쁨은 성경적인 것으로 현대 세계의 '소란스러운 흥겨움', '시끌벅적한 유쾌함'과는 다른 것입니다. 성경적 기쁨은 하나님의 풍성하고 값진 은혜에 대한 깊은 인식, 참된 자신의 존재를 즐거워할 수 있도록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 은혜의 선물을 통해 역사하시는 그분에 대한 신뢰로부터 생겨나는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의 기쁨은 세상에 순응하지 않고 내면에서부터 변화할 때 생겨납니다. 그것은 다른 이들을 향한 열심과 너그러운 사랑 가운데 표현됩니다. 그것은 생각이 새로워지는 데 달려 있으며, 자발성을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이처럼 기쁨은 하나님 백성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갈망하는 모든 것의 초점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기쁨은 온전함, 즉 샬롬을 향해 성장하도록 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을 향해 흘러갑니다. 기쁨은 참된 자신이 되는 자유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의 은사 목록 중 일곱 가지 은사를 살펴보았습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은혜를 실어 나르는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능력과 자유를 주셔서 소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기쁨을 채워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

바울이 로마서 후반부에서 말하듯이 하나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입니다. 의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평강은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의 특징입니다. 희락은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의 특징으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실천하고 자신의 은사를 활용해 사람들에게 그분의 은혜를 전달할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이 관계의 회복을 통해 참된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참된 기쁨을 느끼는 샬롬의 나라입니다.

또한 그 기쁨은 공동체의 다른 지체들과 더불어 경축할 때 더욱 고양됩니다. 서로 지체가 되었다는 인식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듭니다. 그것은 고향을 찾은 것과 같습니다. 그곳에서 각자가 공동체에 유익을 끼치는 고유의 은사들을 가지며, 더 이상 자기 은사가 아닌 일들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시며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3:11) 또 달란트 비유에서도 열심히 일한 종들에게 상을 내리며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가지 은사들을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평상시에 말하고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달랐습니다.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참된 평화를 소유한 사람들만이 생각하고 가질 수 있는 이해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공동체를 건설하고 그 안에서 서로에게 속한 지체가 되어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로 서로를 섬기고 공동체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면 교회들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요? 오늘도 그런 교회를 꿈꿔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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