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s on Spirituality 53

성령의 열매 세 번째 시간에 함께 묵상하는 성령의 열매는 화평입니다. 화평이라는 말은 평화, 평안, 평강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 마음에 평안과 평강이 넘치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큰 축복입니다. 사실 우리는 마음에 평안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대부분 편안입니다. 잠자리도 편안하고, 옷도 편안하고, 경제적으로도 편안하게 사는 것을 우리는 추구합니다. 하지만 편안하다고 해서 마음까지 자동적으로 평안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삶은 편안하지만 마음의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편안보다는 평안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

평안이라는 주제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누려야 할 두 가지의 평안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평화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과의 평화입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근본적인 평안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만 경험하게 됩니다. 젊은 시절 편안한 삶을 찾아 방황했던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 경험한 평안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기 전에는 내 마음에 평안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기 전에는 마음의 참 평안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나오지 못하고 방황했던 그 오랜 시간들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교회의 마당까지 왔지만, 가족들만 내려 주고 교회 주위를 서성이며 기다렸던 그 오랜 시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때로는 예배를 드리러 왔지만, 그 예배에서 어떠한 감흥도 느끼지 못했던 그때를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교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편안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없이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교만입니다. 또한 우리의 죄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습니다. 때로 냄새나는 옷을 입으면 사람들과 접촉을 피하고 싶은 것처럼, 죄의 옷을 입고 있는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피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교만과 죄가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아서기에, 우리는 끝내 하나님께 나아갈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경험하는 근본적인 평안을 누릴 길이 없습니다.

이때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평강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골 3:15). 예수께서 이루신 평강을 골로새서 1:20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예수께서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자들이지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신 그 은혜를 붙잡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고 은혜입니다.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누리십시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 안에 있는 참 평안을 누리십시오.

이웃과의 평화

두 번째, 우리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긋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깨어진 이웃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은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의 이론을 바탕으로 어떻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경험할 수 있는지 가르쳐 주는 책입니다. 이 책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유를 누리는 방법이 미움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남이 나에 대해 내리는 평가에 연연하지 말고, 남이 나를 싫어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남이 나를 인정해주는 삶을 살기 위해 전전긍긍하면서 살아가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 바로 책의 제목입니다. “미움받을 용기!” 다른 사람에게 미움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로 살 때에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책에서 배울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저를 씁쓸하게 한 것은 결국은 모든 것의 기준과 중심이 나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나밖에 없다는 이 근본 정신이 저를 씁쓸하게 만들었습니다. 과연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만을 바라보는 것이 진정한 자유를 줄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자유와 평화를 누리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바라볼 것을 초대합니다. 헨리 나우웬이 이러한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한 젊은이가 전쟁 중에 적을 피하여 한 마을에 숨어듭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청년에게 친절을 베풀어 숨을 곳을 마련해 줍니다. 그런데 적들이 그 마을에 들이닥쳐 청년을 내어놓으라고 다그칩니다. 동이 틀 때까지 청년을 내놓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을 해치겠다고 협박합니다. 그 마을의 지도자는 이 문제로 밤이 새도록 성경을 읽으면서 해답을 찾습니다. 그런데 새벽녘에 이런 말씀이 눈에 들어옵니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이 온 백성이 망하는 것보다 낫다.” 그래서 이 사람은 적들을 불러 청년이 숨은 곳을 알려 줍니다. 청년은 적들에게 넘겨지고, 마을에는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날 밤 천사가 그를 찾아와서 말합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네가 넘긴 청년은 메시야였다.” 이 사람은 깜짝 놀라서 “내가 그 사람이 메시야였는지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자 천사가 말합니다. “성경을 읽는 대신 단 한 번이라도 그 젊은이를 찾아가서 그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면 너는 알았을 것이다.”

헨리 나우웬은 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윤리적인 질문을 던지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청년의 눈을 들여다보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 청년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깨어진 관계에서 회복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습니다. 상대방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보이면 이웃과의 관계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13-14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처럼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받을 때에 그 사람을 용납하고 용서하라고 말하는데, 그 방법은 예수께서 나를 용서하신 것같이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의 얼굴에서 발견하는 것이 바로 나 같은 죄인도 용서해 주신 그리스도의 얼굴일 때,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상대방의 얼굴에서 주님께서 나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주님의 얼굴이 보이면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상대방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내가 받은 상처를 통해서 그 사람을 보고, 내가 말하고 싶은 주장을 통해서 그 사람의 얼굴을 봅니다. 그러니 그 사랑을 용납하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상대방을 보아야합니다. 그 사람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아야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상대방을 보면 그 사람을 용서할 수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모든 깨어진 관계를 주장하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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