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레곤 주 포틀랜드라는 도시에서 4년여 살다가 캘리포니아 얼바인으로 내려와 교회 사역을 한 지 9개월째입니다. 교회성도분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주 듣는 질문이 있습니다. 포틀랜드와 얼바인 어디가 좋으냐는 것입니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순간적으로 고민이 됩니다. 두 도시의 사람들 중 누가 좋으냐는 뜻인지, 아니면 날씨나 주거 환경이 좋으냐는 뜻인지 전후 문맥과 상황으로 잘 파악해야 합니다. 그냥 “얼바인이 살기에 어떠냐?” 또는 “어떤 점이 좋으냐 뭐 불편한 것은 없느냐?”고 물으시면 좋겠는데 꼭 비교 대상을 언급하며 묻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상대적 평가에 익숙해져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 같아 조금 씁쓸합니다. 질문에 맞추어 비교급으로 답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포틀랜드가 더 좋다고 하면 웬지 지금 살고 있는 얼바인이나 여기서 만난 성도분들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고, 얼바인이 훨씬 좋다고 말하면 추억 속에 있는 분들과 그 시절 누렸던 행복을 부정하는 것 같아 조심스럽습니다. 대화를 위해 던지는 가벼운 질문인데 그토록 예민하게 생각하느냐고 하시면 할 말 없지만, 몇번 그런 질문을 받은 저는 나름대로 답을 정했습니다. “포틀랜드는 이러이러한 점이 좋고 얼바인은 이러이러한 점이 좋습니다” 라고요. 물론 얼바인에 대해 말할 때는 좋은 점을 더 많이 언급하고 적극적으로 감정 표현을 합니다. 이곳 성도님들에 대한 칭찬과 감사도 잊지 않습니다. 목회적 배려라고나 할까요?

그렇긴 해도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가끔 비가 그립다고요. 제가 살던 포틀랜드를 상징하는 단어는 ‘비’ 입니다. 가을이 지나면 우기가 시작되어 11월경부터 다음해 4월경까지 흐린 날씨와 비가 이어집니다. 하루에 한 번 이상 부슬부슬 비 내리는 날이 일주일에 4~5일은 됩니다. 변화무쌍한 날도 많아서 비, 햇살, 무지개, 먹구름, 강풍의 버라이어티쇼가 하루 동안 벌어지기도 합니다. 겨울이 되면 낮 시간이 짧아져서 오후 5시만 넘어도 짙은 어두움이 도시를 뒤덮습니다. 다행히 저는 흐린 날씨와 비를 좋아하는 편이어서 지내는 동안 힘들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이곳 얼바인은 1년 열두 달 날씨 변화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침 나절에는 흐린 분위기가 약간 느껴지지만, 10시쯤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태양과 강렬한 자외선이 눈을 부시게 만들지요. 산과 숲이 있다고는 하지만 오레곤 만큼은 아니어서 심심한 느낌도 들고, 같은 날씨의 연속이다 보니 계절의 변화나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합니다. 제 눈에는 민둥산에 가까운 Hill이고 갈라진 바닥이 훤히 보이는 River입니다. Lake가 있기는 하지만 커다란 물탱크이지 호수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비와 빗소리와 비에 젖은 자연과 사람들의 모습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던 몇일 전이었습니다. 새벽녘 문득 몸과 정신이 깨어나면서 행복하고 편안한 감정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황홀경에 빠졌다고나 할까요?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때문이었습니다. 쏴아~ . 모든 것들이 잠들어 있는 시간이어서 더 크고 선명하게 들렸기에 저는 그 소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습니다. 바로 빗소리였습니다. 바람 때문인지 비는 창문까지 두드리고 있었고, 물줄기는 똑똑 소리를 내며 베란다를 적셨습니다. 오랜만에 온몸을 씻은 잔디가 기지개를 펴는 소리도 들리는 듯했습니다. 제 입에선 감사의 고백이 맴돌았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동안 비가 많이 그리웠는데 이렇게 뿌려 주시다니요. 나무와 꽃들이 얼마나 좋아할까요? 저도 너무 좋습니다. 역시 하나님은 저를 사랑하시는군요’ 새벽비에 그토록 행복해진 것을 보면 제가 포틀랜드에 대한 향수병에 걸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저는 행복한 마음으로 잠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비 내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 창가로 갔습니다. 흐린 하늘과 희미하게 내다보이는 자연과 촉촉하게 젖어 있는 대지는 한 폭의 수채화이니까요. 커튼을 걷자 창밖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물방울 맺힌 창문 너머에선 목을 길게 뻗어 올린 스프링쿨러가 360도 회전하며 사방으로 물줄기를 날리고 있었습니다. 쏴아 하는 소리를 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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