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워싱턴이 직접 작성한 기도문 100개 넘어

미 식민지의 종교적 상황

“내가 미국에 도착해서 첫 번째로 놀란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종교생활의 영역이었다. 종교 정신과 자유 정신, 두 가지 정신이 긴밀하게 결합하여 함께 나라를 다스려 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알렉시스 토크빌이 그 유명한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한 말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토크빌은 1831년 5월부터 1832년 3월까지 뉴잉글랜드에서 시작해 켄터키와 미시시피 계곡을 거쳐 남부의 여러 주를 방문했다. 조지 워싱턴이 살았던 18세기, 미 독립혁명 전후의 식민지를 방문한다 하더라도 토크빌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것이다. 그 당시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기독교인들이었고 신앙은 그들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미 독립혁명 전(1775년)에 미국의 인구는 대략 2,493.000명, 기독교인 인구는 전 인구의 74% 정도였던 것으로 본다. 이 중에 대부분은 개신교도들이었다. 청교도들인 회중교회(575,000명), 성공회(500,000명), 장로교(410,000명), 독일계 교회(루터교 포함, 200,000명), 화란개혁교회(75,000명), 퀘이커교(40,000명), 침례교(25,000명), 천주교회(25,000명), 감리교(5,000명), 유대교(2,000명) 등으로 보고 있다.

1730년대부터 시작해 1740년대에 절정을 이룬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이 미 식민지의 신앙을 새롭게 부흥시켰다. 이 대각성 운동은 나뉘어 있었던 미 식민지를 신앙으로 연결시켜 하나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미 독립운동의 연대와 유대감을 제공해 주었다. 뉴잉글랜드에선 청교도인 조나단 에드워드가, 그 외의 지역에선 영국에서 온 성공회 복음주의자인 요한 웨슬레 신부(나중에 감리교회의 창시자로 불려진다. 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성공회를 떠나지 않은 성공회 신부였다.), 조지 화이트필드 신부 등이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미 식민지에는 대부분 공립교회(Established Church, 또는 Tax-Supported) 또는 주립교회(State Church)가 있었다. 청교도들의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는 메사추세츠, 커네티컷, 뉴햄프셔에서 공립교회였다. 성공회(Anglican Church, 또는 Church of England, 나중에는 Episcopal Church)는 뉴욕, 매릴랜드, 노스 캐롤라이나, 사우스 캐롤라이나, 조지아에서 공립교회였다. 로드아일랜드, 뉴저지, 델라웨어, 펜실베니아 등에서는 공립교회를 지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왔던 청교도들은 엄격한 신앙적 적용과 광신적 추구로 세일럼의 마녀 사냥까지 치달았고, 『주홍글씨』로 대변되는 편협함을 낳았다. 반대로 버지니아를 비롯해, 성공회가 공립교회였던 지역에선 오히려 다른 교파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관용이 있었고 계몽주의 사조를 신앙 안에서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는 포용성과 개방성이 있었다. 이는 훗날 미국의 헌법 제정의 중요한 정신적 골간으로 작용한다.

성공회 전통과 버지니아 국부들의 신앙적 배경

버지니아 식민지에선 성공회를 공립교회(Established Church)로 지정했다. 즉 버지니아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성공회 신자가 된다는 말이었다. 버지니아 의회는 성공회를 공립교회로 지정하고, 세금으로 교회를 후원했으며, 다른 교회(교파)로부터 성공회를 보호했다. 미국에서 성공회 교회는 1607년 버지니아의 제임스 타운에 최초로 세워졌다. 버지니아 의회는 식민지가 성장하면서 새로운 행정구역인 카운티(county)와 성공회 전도구(parish)를 지정했다.

성공회 신앙 전통은 미국의 주요 국부들에게 신앙적 자양분을 제공했다.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3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 4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 5대 대통령, 국가적 경제 토대를 만든 알렉산더 해밀턴,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했던 패트릭 헨리, 조지 메이슨, 조지 호이트, 초대 대법원장인 존 제이, 대법원의 사법적 전통을 세우고 삼권분립을 공공히 만든 존 마샬 등은 성공회 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세례를 받았다. 주요 국부 중 존 애덤스 2대 대통령과 벤자민 프랭클린은 어린 시절에는 청교도였지만 성장한 뒤 청교도 신앙을 떠나 이신론적인 신앙을 갖게 되었다.

대부분의 주요국부들은 성공회에서 가족들과 함께 매 주일마다 예배 드리고, 성공회에서 결혼했다. 조지 워싱턴을 비롯해 건국의 아버지들 역시 교회위원(Vestry:개신교의 교회제직에 해당됨)으로서 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이들의 초기 교육은 주로 성공회 신부가 운영하고 가르치는 학교에서 이루어졌고, 그들의 자녀들 역시 성공회가 운영하는 교육기관(academy) 또는 성공회 신부 밑에서 훈육되었다. 이들의 아내와 딸들은 성공회 교회의 헌신적인 평신도들이었으며, 이들이 죽었을 때 성공회 신부가 장례를 집전했다.

성공회 공동기도서에 의한 신앙

조지 워싱턴을 비롯한 버지나아 국부들은 성공회 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로 신앙 생활을 했다. 성공회 전통에선 공동기도서를 통해 주일마다 공적인 예배와 아침기도, 저녁기도를 드린다. 아침기도, 저녁기도는 가족들과 함께 또는 개인적으로 드릴 수 있다. 이들이 작성한 편지나 개인 기도문에 나오는 용어, 표현, 내용들은 대체로 그들이 아침, 저녁 또는 매주일 드렸던 성공회 공동기도서의 것과 유사하고 기도서의 운율을 느낄 수 있다. 조지 워싱턴의 할아버지는 성공회 신부였다. 제4대 대통령인 제임스 매디슨 역시 성공회 성직자 집안 출신이었다. 그들은 성공회 공동기도서로 기도드렸기에 공동기도서에 나오는 용어와 표현들이 익숙했다. 청교도 신앙을 떠난 벤자민 프랭클린은 후에 성공회 공동기도서에 매료되어 1662년 기도서를 현대적인 영어로 직접 개정했고 자비(自費)로 성공회 공동기도서를 출판했다.

조지 워싱턴이 프렌치 인디언 전투(1755)에 참여했을 때, 영국군 에드워드 브래독 장군(Edward Braddock)이 전사했다. 이때 조지 워싱턴은 1662년에 만든 성공회 공동기도서에 의한 장례예식(Order for the Burial of the Dead)으로 예배를 인도했다.

조지 워싱턴이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해 첫 번째로 내린 1775년 7월 4일자 명령서는 다음과 같다. “사령관으로서 나는 모든 군인들이 불경건한 저주, 욕설, 만취를 금지한 군대의 전쟁 법령을 존중하고 준수할 것을 진심으로 당부하는 바이다. 근무에 참여하지 않는 모든 장교와 병사들은 매일 기도에 정확하게 참여해, 우리의 안전과 보호를 위하여 하늘의 축복을 간구하기를 요청하길 기대하는 바이다.”

조지 워싱턴은 모든 군대가 매일 공식적인 아침기도로 시작하고 모든 장교들은 기도를 인도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매일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었고 독립전쟁의 승패는 하느님의 축복에 의해 가능하다고 믿었다.

놀라운 것은 조지 워싱턴이 직접 자신의 손으로 기록한 기도문이 무려 100개가 넘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신부인 나도 실천하지 못하는 장문의 아침기도문과 저녁기도문을 날마다 작성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성직자(신부와 목사)들이 조지 워싱턴이 했던 것처럼 기도문을 담은 편지를 보내고 있을까? 그런데 조지 워싱턴은 무수히 많은 편지 속에 기도문을 직접 작성해 첨부하였다. 이를 알고 있는 부관 알렉산더 해밀턴도, 국무장관으로 재직했던 토마스 제퍼슨도 조지 워싱턴을 따라서 편지 말미에 기도문을 첨부해 보냈다. 조지 워싱턴은 1662년 성공회 공동기도서를 통하여 어려서부터 신앙 훈련을 했기에 그 기도서의 신앙의 내용들이 몸에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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